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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Apr 17. 2024

33. ‘결괴’:둑이나 방죽이 물에 밀려 넘어짐.

-터지고 무너지고 살아남은 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이다.”

라고들 말하지만

’정말로 늦어 버렸을‘ 때도 있다.


정말 ‘늦기만’ 했다라면

그리고 그것이 정말 절실함을 알았다라면

또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때의 절실함은 어디로 갔을까?





나도 ‘나’이긴 마찬가지.



과도한 압력을 받았다.


밀어내려는 힘은 똘똘 뭉쳤고

버티는 힘은 흩어지고 말았으며

일한 것이 계속 일정하게 유지될

시스템은 만들지도 못하고

결국 아파서 나왔다.

직장에서 창의적으로, 열정적으로 일한 전력이

스스로의 창의와 열정을 해치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새로운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자존감이든, 동기, 의욕이든, 회복력이든 무엇이나

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운명이 뭐가 됐든 싸움을 피하지 않았었던

과거의 나라면

지금 나는 단지 상황에 충실할 뿐,

‘노력하지 않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가

또다른 ‘보복의 프레임’에 갇힌 결과인가를.





“파렴치를 분쇄하라.”

- 계몽사상가 볼테르



조직을 끌고 간다면

갈등 조정은 중요한 의무가 아닐까.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긴장을 없애는 게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겐

현실의 고통을 탕감시켜 주는 시혜와 같았을 텐데...


“공직자는 교육, 근로, 납세, 국방의 4의무 외에

설명’의 의무가 있다.

설명의 의무를 다하려면

1. 사회적 감수성, 2. 정성/정량적 접근의 배합, 3. 질문에 대한 준비,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 나의 메모장에서 읽힌 내용이다.

그러나 다 ‘헛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때 나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한 마디로 바람이 거셌고 

나는 따뜻한 한 줄기 햇빛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행복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는 ‘내가 모자라다.’라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왕따가 횡행했다.


상황이 한번 꼬이면

운‘과 ’불운‘의 수급 불균형이 극대화되면서

주변 환경이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사람을 지배한다.

한마디로 손을 쓸 수가 없이

사정 없이 내리막을 구르게 되고

인정사정 없이 망하는 것이다.


파렴치한 사람들이

‘순전히 일부러/악의적으로’ 비난하고 트집을 잡거나

감춰진 적의마저 들추는 일들을


당시로선

한걸음 물러날 수도,

물러서서 원인을 찾을 수도 없었다.

내가 알았던 것은

좀처럼 대체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해서

대체될 수 있었나에 관해서였다.


한번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내 가족이라면 어떤 걸 해 줄까’,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일군의 공무 집행자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일과 사람을 대할 때 시간과 노력을 아꼈다.


내 눈엔 그게 파렴치한데도

본인들은 합리화에 능했고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또 메모장에 이런 내용을 옮겨놓고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기관

국가나 상위 기관(단체)이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이것을 ‘보조성의 원리’라 한다.“라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문제 투성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은 거의가 온전한 내 수단이다.

다시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렸다.

지금의 나는 된통 아프고 난 후

될 것 같아야 열심히 할 나‘이다.


사실 과장이나 ‘G'들과 나의 시작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고

미묘한 ‘유격(裕隔)’이

사람을 피곤해지게 한다.


거기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노숙자 한 명이 죽은 것보다

주가 2퍼센트 하락을 더 못 견디는 게 사람”이라고.

그것들은 모두 합쳐져서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


스스로 움직인 죄

좋아했던 일과 하나가 된 죄

득과 실을 나누지 못한 죄

그리고 절실하고 절실한 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못한 죄


“이 세상에 100%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2021년 드라마, ‘원더우먼’ 중)“는 말이 맞다면


거기에 내가 있었던 죄

더 잘 맞는 사람들 틈에 끈질기게 살아남은 죄

등등

낱낱이 죄상을 끌어내 본다.


그리고 오늘 힘든 이유 :

일을 놓게 된 것이

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음으로 인해


내 안의 더 큰 힘에 삶을 맡긴

현실이 자꾸 실감이 안 나고


한번씩 허리띠를 매어 보는 것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Let your loins be girded

and your lamps burning"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아라: 루카 복음 중)


출처: https://hymnsforworship.org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망쳐서 도착한 이 곳에서 나는 과연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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