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머리를 앓게 했던 구태의연 끝판왕 조직생활
안타까운 일은 하루에도 수많게 있다.
내가 다 알지 못할 뿐이다.
신체적/정신적 괴롭힘/학대가 일어났다고 할 때
그것이 더구나 어린아이가 입은 피해라면
사실을 목격한 사람에겐
아이를 구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다가,
누구인지 모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잠을 설치게 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랬다. ‘내 아이인가?’ 해서
놀라 깨기도 수없이 했다.
살면서 시간을 다 써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나를 설레게 했던 연인을 향한 불도 꺼졌으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충성을 다 바친 관계도,
헌신을 다 한 일도 끝이 났다.
불이 꺼지지 않았으면 어쩌면 내가 타 죽었을 것이고
권력을 갖고 사람을 부린 만큼 되갚지 않는 이를
계속하여 바라보다간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오늘 찾은 병원 원장님께서는
“다 나은 것 같아도 사람이 준 스트레스는
몸에서 바로 없어지지 않아.”라고 하셨다.
약을 계속 받아 왔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
과장은 나를 가리켜 필시
‘(자기) 발끝만큼도 못 쫓아올 놈’이었다고
회고할 거며
나는 누군가 과장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감(깜)이 아닌데 승진했고,
남을 혹평하는 데 정력을 써 버려‘라고
말할 테니까.
좋게 말해서 ’입장 차’이다.
과장의 능력치는 대체로 하위에 속했다.
그의 유능함이란 그저 나를 대상으로
권력 기반의 따돌림을 행사한 데서
최고조에 달했다.
조직에 아직 남아 있는 그에게
‘떠나라!’는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장치는 일절 없다.
나도 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성’대리‘였고
과장은 ‘과장’이어서,
조직을 위해 한창 일하는 사람을 거품 떠 내듯이
모욕적으로 걷어낼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식으로 비열하게
사람을 제거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여기는 더구나 공공기관이 아니냐고
지적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왠 줄 알아? 과장은 승자야.
보기엔 엄청난 또라이 짓을 해도
아랫사람이니까 성대리가 참았어야지.
그러니 내가 병이 나고 나서
사람들이 입을 맞추게 된 것이다.
라는 과장의 기준으로 시점을 통일한 뒤
모든 것을 참아 주었다.
참는 데는, 과장의 실수를 위장한 무능과
‘성대리’에게 돌려맞은 아픈 구석을
진짜라는 듯 끄덕여 주는 무한 긍정도 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실수와 착오를 정당화/미화시키는
태도의 주체가 상사라면 다 통해서다.
이게 우리 조직에 ‘유능/무능한 꼴통’이 많은 이유다.
승리자가 되면 어떤 짓을 해도 무마되는 것을 목격한 후배들이 또 그를 모방하며 자란다.
후배들은 젊다시피 모든 부분 빨리 실력을 갖춘다.
또라이 짓을 하고도 퇴출되지 않는 승리자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아부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승리자의 사과나 반성을 요구한 사람이
모든 걸 덮어쓰지 않는 경우란 없는 법.
열과 성을 다해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서
혹은 스스로가 생각할 때 어떤 일을 특출나게 잘해서
자타가 인정하는 자리에 올라오고 나서는
젊고 유능한 사원들을 일상적으로 깔보고
인신공격성 발언을 입에 달고 살면서
과장은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성대리도 자신이 길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개입하는 고과 점수를 무기로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살아 온 대로
삶을 헤쳐 나가니까.
과장이 보고 겪고 배운 세상은 그랬겠지만,
성대리는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길, 또한
조직에 ‘양식 있는사람’들이 늘어나길 원했지,
점수만 원하지 않았다. 물론 욕심도 있었다.
기관장이 자리에 참석했다.
기관의 정체성에 직결된 행사가 치러지고 있었다.
본데없고 예의범절 모르던 ’도전자‘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했다.
기관장이 보는 앞에서
자기 사수인 나를 막 챙기는 거였다.
일전에 썼던 대로 ‘도와 주지 않고 방해한’ 장본인이
유일하게, 딱 한 번 나를 하대하지 않은 날이라
기억에 남아 있다.
기관장이 왔기 때문에
나를 ‘대리님~~’이라고 코 멩멩하게 부르면서
늘상 그러고 있었다는 듯 밀착해 왔다.
그게 첨이고 마지막이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을까.
먹고 먹히는 전쟁터로 조직을 이해하고
임기응변에 강해지며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서 승자가 되고 나면
경쟁에 같이 참여했으나 레이스에서 떨어진 사람을
‘루저’ 취급해 버리는 방법을.
어디서 배웠을지 모르는,
끊임없이 아첨하고
‘딜레마에서 자기 혼자 살아남는 방법‘을
최선을 다해 수련한 ‘도전자‘가
무럭무럭 자라서
예의 나를 바라보던 것과 똑같은
애정과 존경이 쏙 빠진 경멸하는 눈빛으로
사람을 -자기보다 약자이면 - 함부로 할 것이며
자신이 승진했다는 것을 승리로 인식하여
수족이 되지 않으면 잘라내겠다는 태도로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시스템은 그가 채용 면접에서 걸러지지 않고
현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자세가 바로 나타났는대
그렇다면 어떤 일의 경우 탁월하더라도
그것을 유능하다고 인정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또라이들끼리 연합하고 뭉치게 되는 일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직위와 서열에 의해 사람을 나누고
자기 규율이 수준 이하인 사람이
오직 조직 성과와 무관한 개인 실적과
교류 없는 점수 관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주구장창 열려 있다.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할지는 과거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또라이 제로 조직’, 로버트 서튼, 167쪽)
“참아야지 어쩌겠어요.”라고 말하면서
과장 밑에서 버티는 경우의 수는
내게 현실이 되지 않았다.
때로 현실의 급박함은
유불리를 따지기도 전에 판도라를 열게도 한다.
앞으로는 ?
갔던 길이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돌아나오자.
아프지나 말든가 해야지
건강해도 안 돌아봤는데
아프다고 하면 그래 누가 나한테 신경 쓰던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