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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May 15. 2024

41. 고통이 나를 떠나는 순간은

- 과거의 나를 인정하고 나서 보이는 것들이 관건.


사람이 아프면 단순해진다.

‘낫기만 하면 좋겠는데’ 그 생각 하나로.

사람이 아프면 겸손해진다.

‘내가 왜 이다지도 아픈 걸까? 벌 받나?’ 싶은 생각에.


한동안 마치 ‘풍선이 불에 달구어진’(‘결국 이기는 사람들의 비밀’, 리웨이원, 14쪽) 상태에 있던

구 직장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힘에 부침을 항시 느낄 때

그래도 나는 내가 정말 아플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내가 다운 되어 승부가 나리라는 것은

결말을 보고서야 알았다.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일 : 따돌림



현실은 시계 바늘이 움직임을 따라 힘차게 돌아갔다. 내가 따돌려지고 극한 상황에 놓였다고 해도

주위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모르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그렇게 몰려다니기만 하면

그럼 따돌림은 영영 오지 않을까?

정말? 아닐 텐데?

누구라도 따돌려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그래서 난,

힘의 관계에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방심하는 순간이

경계해야 할 바로 그 때임을 말해 두고 싶다.





연거푸 실패한 일은 그만두는 게 수.



말했듯이 나는 승자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을 잘못 만난 불운이건(이것은 남 탓.),

내가 권력의 속성을 이해 못 하거나

‘고압적 태도’라고 주장하는 누군가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뒷담을 당하는 등

나도 모를 실수(이것은 ‘자책’)를 했건,

어찌 되었건

나는 손 안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낯선 오늘들을 살아 내고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여러가지지만,

실패를 이기는 방법은

빨리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 하나다.

오래 눌러 있는 것을 ‘근성’이라 한다면

그런 성격이 사람에게 성공을 가져오는 시대는

고속 성장의 시대에 한한다.

한마디로 물 건너간 이야기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던 일이 잘 된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 될 거란 보장이 없는데,

심지어 안 풀리는 일을 풀릴 때까지 계속하여

꼬인 매듭만 째려 본다는 것은

천지 의미 없다.

당장 벗어났어야 했다.

건강을 해치기 일보 직전에라도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수많은 날들 야근으로 나를 태우면서

나는 가족과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잠만 자고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달려 나갔다.

왜 그랬을까. 나는 워커홀릭이었던 걸까

아마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해야 했다면

노동청에 일러바칠 일일 게다.

업무라는 게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직장생활에 푹 빠져서 즐거웠던 것 같다.

자꾸 머릿속에서

아이디어와 그것이 실현됬을 때의 청사진이

프린터에서 인쇄물이 나오듯 흘러나왔다.

그랬으면 좋았을 일들.


그만두고 접었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아쉽고 안타까운 나의 실패작들.


여전히 즐거웠던 일터가 그립다.


그때 올려보았던 하늘이 어여뻐서

나는 요즘도 하늘을 자주 쳐다 본다.

‘그 하늘인가’ 하며.





고통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고통을 안고 있는 것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인생이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 어느 카페에 올라온 글 중에서.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나는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일을 잡으면

적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어차피 나는 ‘밀림 세계의 강자( 위 책, 191쪽)’가

되지 못했다.

그게 내 탓이라고 우길 것이 필시 과장의 입장이고,

원래부터 체질이 약하고 방어 능력이 미비된 약체였고 따라서 공단은 보상해 주지 않겠다고

공무상 요양 신청을 불승인한 것이

인사혁신처 모 협의체의 결정이었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그들’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고통스럽게 사회적 따돌림의 옥죔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나는

그나마의 문제 해결 능력을 담금질 받았다.


내가 일에 미쳐서, 직장 사람들을 ‘나’처럼 여겨서

손 놓다시피 하고 살았던,

‘언젠가 할 거야’라고 미루었던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나는 사실은 나를 돌보아야 했던 걸 애써 외면하며

나는 퇴직이 아직 많이 남은 사람이라며

자꾸 그렇게 미루었었는데

덮는다고 가려지는 일은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어떻게 가리나.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고

변화의 조짐은 공직 사회에서도 감지되었다.

다만 ‘일하는 문화’가

합리적이라든가 역동적으로 만들어 나가고

결국은 목표를 채워 내는 체계와는

여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때로는 역행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달리는 기차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을 아실 것이다.

물론 많이 답답하다.

입 다물고 느리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위로는 빠르게 올라가는 걸 지켜 보면서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부끄러움은 늘 나의 몫



내가 참 싫어하는 H 자동차의 꼭 그 색상 그 세단이

꼭 짠 듯이, 열이면 열 모두

방향지시등을 안 켜고 끼어들 때

나는 과장이 떠오른다.

내가 참 싫어하는

마음과는 다른 말로 낯을 간지럽히는 겉치레가

부담 백배일 때

나는 과장이 떠오른다.


나는 과장이

자기 자리 옆으로 성대리가 자리를 옮겨갈때

성대리에게 한 말이 그날처럼 생생하게 섬뜩하다.

“내 옆에 와 보면 내가 달리 보일 거야.”

(그래도 온다구? 한번 와 봐. 그럼.)

‘저런 말을 왜 하지? ’라고 여겼을 때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 줄을 알았어야 했다.

인간이 원래 한 치 앞을 못 본다고 하는데

나는 봤어야 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두고두고 기분이 엉망이 될 수도 있기에

나는 매일매일 벗어난다. 노력하면 언젠가 된다고.

그게 최선인 지금의 내게

역경을 이기고 무엇이 보이는가 묻는다면

아직 컴컴한 과장의 그림자가 연기 속에 피어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초년생도 아닌 나에게 좌절한 경험은

자신을 산산조각을 내다시피 했고

앞도 뒤도 없는 존재로 탈탈 털려서

한동안을 멍하니 서 있게 했다.


눈 앞의 이득을 쫓아 간 사람들에 대한 회의도

무척 잊기 어려웠다. 인지상정인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요동을 쳤다.


고통에 짓이길 대로 짓이겨지고 나서야

‘내’가 ‘내’ 눈에 보였다.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의지’가 있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나의 ‘사장’이 되고 싶어서

다시 해 보기로 했다. 살아보기로 했다.

나의 ‘시간’이 온전한 도구가 되어 준다면

무엇이든지 두려움에 먼저 쓰러지지 않고

새로움에 마냥 주눅들지 않는 기질은 

아직 고스란하다는 것을 믿자고 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기에

누구의 보상이나 사죄가 선행되지 아니하더라도

나의 ‘핵심 능력’으로 발휘될 에너지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게 나에게는 ‘제로(0)‘이면서 ’백(100)’이었다.

‘알파이면서 오메가’라고 말을 해야 할까...


주어진 길을 차근히 걸어가야겠다.

보상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돈다고 했다.



https://brunch.co.kr/@notepod/34

초맹’작가님은 가히 천재적! 자다가 생각나서 웃었다.


그리고 김영근이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


https://www.youtube.com/watch?v=D5eDD1Bo_aw&pp=ygUj6rmA7JiB6re8IOuwlOuztOyymOufvOyCtOyVmOq1sOyalCA%3D

맞다. 바보처럼 살았다. 담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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