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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May 26. 2024

44. 매를 맞는 것 같은 하루

-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하루에 두 곳 병원을 가야 했다.

바쁜 걸음을 해야 하고 다소 짜증나려고 하는

진료 대기를 소화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이를 두고 ‘관리‘라고 지칭한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관리받는’ 중이라니.

누가 건강에 대해 물어보면 ‘관리 중이에요.’ 한다.





내가 남을 바꿀 수는 없다. 늘. 언제나.



한 곳은 오래 전부터 이 분야의 전문의로

소개받아 온 원장님의 병원이다.

오늘은 처리해야 할 일도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병원 진료시간을 시간차로

치고 지나가야 하지만

줄거운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오늘은

잘 안 풀린다.


나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다.

내가 공무원이면서 관공서에 출입할 일이 있을 때

예를 들면 전입 신고를 한다고 치자.

주민센터에서 전입 신고를 할 수 있는 민원 창구 모습.

나는 그 사람이 오늘 기분이 좋은지 기분이 안 좋은지,

그 사람이 오늘 몸 상태가 어떤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때로는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고 나올 때도 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는 아팠던 것이고

병원을 찾아야 했다.

이 병원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원장님은 예의 무뚝뚝했다.

상비약이 남았는지 한번 물어볼 만 한데 묻지 않았다.


한번은 내원하지 않는 기간 중의

이상 징후를 써 오라고 했었는데

닐짜와 횟수 기록이 양식과 어긋난다고 호통을 쳤다.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힘이 들었다.

정기적으로 약을 받아온다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재발이 많은 증상이다 보니 환자는 불어났고

원장님은 진료실에서 자주 호통을 쳤다.


긴장을 유지히며 내원하는 일을

잘 견뎌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야.’라는 생각으로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라는 후회가 함께 일었다.

들러야 했던 두 번째 병원이 있어서 알 수 있었다.





싫은 것에는 이유가 있어



들어서는데 웃으면서 맞는다.

간호 선생님들부터 양 병원이 너무 판이하다.

나도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조금 전 병원에서의 불편감이 잊혀지려고 한다.


이것저것 다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치료를 줄일까 물어보니 “온 김에 다 여쭤 보”라고 한다.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더 붙일라 싶어

방어 자세로 굳었던 그들에게서 온 긴장이 풀어진다.


원장님과의 차례다. 평소처럼

그간의 지낸 생활을 묻고 오늘의 내 상태를 체크한 후

오늘 진료 목적은 이것과 저것이라고 말해 주신다.

나는 받아들인다. 지난 한 주간 기력을 다 썼기 때문에

다시 나눠서 내원하더라도

오늘은 약한 치료법을 원한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치료는 치료가 아니다.


싫어해 본 것들은

음식이나 옷가지, 여행 코스나 숙박 시설에도

있었지만 대개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많았다. 내게 상대방으로 하여 존중하게 할

지위나 사회적 위치, 금전적 우위, 우월한 외관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을 수 없을까?

특히 병원에서는 ‘아픈 인간이라는 이유로‘

문답식 진찰과 치료 과정에서의 불편/부담감을 해소할 용기가 나도록 ‘지원’받으면 어디가 어떻게 되나?


내가 일해 온 공공 기관에서는

매 순간 마다 사람이 바뀌고 상황이 다른데

일 통계와 월/분기/반기 별로 통계를 추적해

자료화하고 조금 더 핀셋이 되는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면 안 됬던 것일까?!


내 경험에 의하면 싸움이 나고 분쟁이 되는 것들은

이유가 같다. ‘불만족’이 있었기 때문이며

‘싫다’고 하는 것을 이거 밖엔 없으니 제공받으라고

구역구역 밀어 넣기 때문에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케바케’라는 점을 망각한 채

자신이 루틴으로 정한 바

자기 영역이며 자기 병원이라 해서

오는 민원을, 오는 환자를

발로 차듯, 매로 치듯 대해서

쫒아 버리는 이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권위는 ‘갖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우러나는 것



‘의사 파동’이라 뭉뚱그리지 않겠다.

솔직하게 말해서 사회적 이슈가 크게 일면

‘수박 겉핡기’ 수준에 그쳤으며

 ‘천만(관객) 영화’는 ‘도둑들’ 밖에 안 봤고

‘조인성’ 배우를 보려고 간 영화 ‘밀수’는 천만 흥행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공무원 밖에 모르고 그 폭도 전 직렬에 걸쳐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저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위아래로 훓어서 견적을 낸다든지,

자신이 어렵게 딴 전문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권위로 눌러 버려서 

어쨌거나 ‘사람’으로 환자를 보려고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환자가 병원 문턱을 넘어서면서 안도하게 하고

처방을 받아서 돌아갈 때 ‘내가 나을 거야.’하는 힘을 불어넣을 수 없도록 한다는 이야기만 한다.


명성을 갖게 되고 자격이 높아지면

저절로 인간성이 고양되지는 않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이슈’를 파고 들지 않거나

환자나 민원인이나 자신을 찾아 온 ‘고객’을 

‘고객’으로 대하는 ‘서비스 정신’이 결여된 자세를

글로 써 내려 간 공통적인 이유는

 ‘기득권개념이 우리 사회

원초성처럼 강건하다는 것이며

사회/ 역사적으로 ‘기득권’이

돈에 직결되어 ‘잘 사는 일’을 말하는

단어가 됐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이 환자 ‘1명’으로 카운트될 뿐인 병원

유능함과 전문적이라는 짐작 만으로

매 맞듯 계속해 호통을 당하면서 다닌

내가 나에게 잘못 했다.

간혹 내가 이 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다른 병원을 추천해 줄 때 내가 한 말을

여기서 ‘싹뚝’ 자르고 싶다.


“아냐, 종합병원(OOOO)에서 소문 나서 개업한 지도 오래 된 이 분야 권위(자)야.” 라고 했었다.


게으름이 오늘따라 아프다.

나를 더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의사에게

인도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이유는

게으름 밖에 없다. 찾아 볼 결심을 해야 한다.


나는 낫기 위해 ‘좋은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꼭 그래야 한다.


- 커버 이미지: ’헤어질 결심(2022년) 영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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