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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Jun 16. 2024

50. 하고픈 것을 하게 해라

- 그리고 너도 좀 그래라


상권을 분석한다는 일이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식과 다양한 툴을 쓸 수 있다는 데에 근래 재미를 느꼈다.


‘내가 창업하고 그 입지를 직접 선정한다면?’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이것저것 들여다 보게 됐다.

모르던 내용을 숙지하려면

처음에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찾아 보고

강의를 듣는 게 보통의 순서다.


기존 중간에 가로채는 것을 흔히 ‘인터셉트’한다고 말한다. 상권에서도 배후 세대와 잘 나가는 경쟁점 사이에서 창업함으로써 경쟁점의 고객을 ‘잘라 먹는’다고 한단다. 입지를 잘라서 정확히 가로채는 것이다.


가로채기도 당하고 가로채기도 해 보고

그렇게 살아 봤는가.

이제야 말하지만 생존율을 높이는 것은

내가 (남의 것을) 가로채는 것이긴 하다.





잘 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하루 하루가

편안하지 않고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어떻게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

다시 돌이켜도 나는 참 근시안이었다.


옆에서 불공을 들이고 염불을 외듯 온갖 치성을

‘성대리가 시험에 붙어서 나가지 않는’ 데다

숫제 쏟아붇고 있었다.

내가 부처님 그리스도님 마호메트님 신령님이라도

와서 비는 놈에게 눈길을 주면 줬지,

빌지도 않는 성대리가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지든 말든 신경을 껐을 것이다.


옆에서 잘잘못을 늘 따지고

키우는 부모가 아이를 늘 나무라면,

사람은 누구나 의욕이 꺾이고

아이들은 뭘 하길 싫어한다.

어차피 안 될 거니까, 어차피 혼나니까.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기 인생을 충분히 잘 살아야 하는 건데


과장 밑에 있던 송과장이나, 과장 자신,

그리고 G들 모두가

‘저렇게 살아도 한 인생이구나.’ 라고 여겨질 만큼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좀 더 안스럽게 보이려고 그 불행을 자기 입으로 떠벌이고 살아서

사내에서 그들을 몇달만 겪은 사람들은

그 집 숟가락 갯수를 알았다.


그런데 그런 것이 언젠가 연기할 무대의 ‘장치’였고 자신에게 사람들이 마지막 돌을 던지지 못하게 도포해 놓는 ‘연화제’라는 걸

그 시절의 나는 몰랐다.


사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마음을 언젠간 알아 주리라 믿어 보는, 그런 쪽의 ‘약간 고상한’(?),

(대부분의 사람들이)그냥 버리고 가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지금에야 아는 것이긴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외면해 봐야

나는 열정을 잃었고 그러므로 껍데기다.



버스를 놓치는 날은 계속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지하철은 꼭 내가 겨우 한 계단만 밟았을 때 저 아래에서 ‘문이 닫힙니다.’라고 한다. 뛰어도 못 탄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거나 똑같다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하면 택시는 모두

‘예약’ 불을 켰거나 뒤에 손님이 타고 있다.


내가 하얀 셔츠만 입고 나가는 날이면

꼭 구내식당에선 육개장이나 닭볶음탕을

준비하고 나를 맞는다.


그럴 땐 ‘재수’ 타령하면서 짜증이 나는 마음을 달래고

내가 하려는 일이 정말 시급한 일인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진짜 가야 할 곳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지만 현실에선 대부분 그냥 짜증이 가득한 상태로 계속 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미래를 알지 못하면서도

막연히 잘 되리란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크게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라야 멈춘다.

한번 멈추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서는 것은 어렵다.





길을 막지 마라



성대리가 매우 쉽게 하고 있는 것 같고

자기네들보다 잘 풀리는 것 같아서

‘그건 안 되지!’ 하는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이여.

누구나 한계가 있고

한계를 밀어내고 그 일을 해 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으로 시작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끝까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몹시 괴로와 했었다.


개인 삶이 어느 모로나 나아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공직 사회에 소명 의식과 연대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가로채기, 끼어들기, 찍어내기가 만연했다. ‘오너’도 없지만 ‘프러너(preneur)'도 없는 세상에 질식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은 무척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

사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많이 있다.

19년도에는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들’을 ‘하비프러너’라고 이름해 부르기도 했었다. 아직 코로나 전이었다.


https://programs.sbs.co.kr/culture/sbsspecial/vod/4028/22000353537


인간이 매력적이라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그 하나라고 생각된다. 물론 요즘은 또다른 많은 이들이 근로하지 않고 자본소득만으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려고 한다. 그것이 또한 자기에게 맞는 세팅을 위한 두뇌 풀 가동에 손품과 발품을 더하므로 굳이 배척하려고 들어선 안 됨이니 주의가 요망된다.


나는 사람에게 많이 다가갔던 편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인생에서 많았던 쪽이다.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


놀랍도록 열정 부자인 사람들에게서,

자기가 하는 일을 다각도로 시뮬레이션 해 보고 제3자 입장에서 리모델링 한 사람들에게서,

돈은 노력에 따라 오는 것이라 믿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태도 없이 수많은 공을 들이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자기가 하고서 “내가 언제 그랬냐.” “입증할 수 있냐?“고 오리발을 내놓는 사람에게서,

야간에 사무실에 남아서 성대리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모여서 문을 안으로 잠그고 과장과 머리를 맞댔던 사람들에게서,

나는 ‘이미 다 된 공부’이고 ‘너한테 시간을 뺏기기 않겠다.’고 스터디를 폭파하고 나간 스터디장에게서,


자기 삶을 지독히 사랑했을지 모르는 그들에게서

그러나 악취가 난다.


처음 공무상요양승인 신청이 거절당하고 나서

내가 마음 속 응어리들을 어떻게 ‘브런치’ 글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니 깜깜한 터널이 보였는데

오늘 4개월 여 만에 50번째 글을 올린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줄 수 있는지,

공직자가, 공직 사회가 바뀌지 않기 위해 얼마나 순수한 열정에 찼던 이들을 강고하게 배격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무겁고 어둡게 여겨지실까 걱정했다.


모자란 글 솜씨로 내 ‘잘 싸매지 못한 상처’를 군데군데 비친 것 같아서 매번 발행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늘 나의 일을 사랑하고 내가 열심히 뛰어들었던 선택에 충실하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브런치 안팎의 많은 일을 열정 가득히 채워 가려고 한다.


읽어 주신 분들, 매번 읽어 주신 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도 ‘성대리’는 쓰지 못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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