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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Jun 26. 2024

53. 침체에도 살아남으려면

- 나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정체기가 왔다.

공무상요양 승인 신청이 거절되었고

나름의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삶이 순간 순간 내게 '대기 발령'을 주었듯

기다림의 시간이 왔다.

이것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저것도 망설여지는 시간.

브런치에서 필명으로 낯익은 작가님들에게

기대어 본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묻는다.


‘열정적으로 살아야지,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안주하려고 하는 거야? 건강이 문제라고?

언제까지 핑계만 댈 거야?‘


아닌 게 아니라 한 번 아파 본 사람은

도로 '병'이 난다는 게 제일 무서운 것 같다.

그런데 꼭 그것만이 무서운 게 아니다.

'다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끝나 버린 게 아닐까.




알람을 껐던 나의 팔이
지금까지 아프게 느껴진다.



아침 5시 30분에서 30분 가량은

5~10개 가량의 알람이 울린다.

좀 피곤하다고 생각되는 날은

잘 때 알람 갯수를 늘려 놓고 잔다.

누구도 나에게 "일어나라!, 일어나 나가라!"

하지 않는다. 알람 밖에는 없다.

이 때 수많은 알람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출근을 하지 못하고

드러눕고 또 드러눕는 시간들은

나로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의

쏠림'과 '몰림'으로 인한 것이었다.


나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영화 '건축학 개론' 에서 조정석 배우(납뜩이)의 수려한 손짓 발짓과 함께,

정말 '납득'이 되어야 한 순간이라도 삶을 연장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그 ‘납득’을 할 수 없었다.



'건축학개론(2012)'에서 "납뜩이 안 되네, 납뜩이" 분량을 소화한 배우 조정석은 '연기의 신' 같았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도 좋으니 직장이 고요했으면 좋겠단 생각들.

하나도 바뀌지 않아야 내가 적응한 대로 편안하게 직장에 다니겠다는 바램들.

그리고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대리 하나쯤 없어져도 내 생활에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더 좋겠단 '기대'들.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내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버리지?


결과적으로 보면, 나의 알람을 끈 것은 사무실에 나가면 마주쳐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본다는 생각이 내게는 낭떠러지에서

간신히 한 손만으로 버티는 일처럼 어렵디 어려웠다.


사람의 몸에는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많은 세균과 독소가 같이 산다고 한다.

생활이 정상적이고 문제가 없을 때라면

사이 좋은 공존을 이어가다가

나의 고단함이, 피로가, 약함이 터질 때

갑자기 그 많은 병균들이

약한 지점을 공략해서 '병'을 낸다는 것이다.

아프고도 아팠다.


같은 직렬, 동일 직급이라도 천차만별이다.

능력과 집중도에 따라 업무 성과가 큰 차이로 났다.

그래도 사람으로선 같이 살아갈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있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는 영화 '기생충(2019)' 에 나온 송강호 배우의 명대사다.


'계획은 계획일 뿐'일 때도 있지만, 악의를 가지면 어김없이 계획대로 되곤 한다.


정말 이전까지 나와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웃었던

그 사람들에게

다 계획과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성대리의 직장 생활에 위기가 오자, 성대리의 몸 속 병균에서 독소가 나와 체내 곳곳에 염증과 기능 부전을 돌발시키는 총공격을 했듯,

그들이 각자의 불만을 쏟아내면서 직접적으로 할 수 없었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과 생각을

계획한 듯이 행동으로 옮겨 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들려 나왔다.


"세상이 다 그렇지, 6급이니까 괜찮아, 그냥 살아,

뭘 하려고 그래, 그 때 어째 보기 싫더라니",

수많은 말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꿈에 나올까 봐 못 보던 내게

그들이 몰려 다니는 모습이

영화 '부산행' 기차 속 좀비들 같이 보여서 무서웠다.

무서운 꿈을 계속 꿨다. 그리고 아침에는 잠을 못 자서 덜덜 떨리는 팔을 움직여 알람을 껐다.


영화 '부산행'(2016년) 포스터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웃음을 잃어버렸고

내가 죽은 것 같이 나도 느껴졌다.





아무리 선을 긋고 금을 쳐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벌써 내 근육에 새겨졌다.



정체가 온 것을 느끼는 것은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좀더 자주, 그러나 간헐적으로.

이런 상태가 올까봐 도리어 주 7일 중 1일도 쉬지 않았더니만  무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말해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사무실 주변 순환 도로를 낀 공터를

긴 치맛자락으로 쓸다시피 하며

수십 바퀴를 자기들끼리 돌던 그네들 때문에

아직도 길에서

기나긴 치맛자락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서 힘들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생각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을 잘도 버렸을까. 생각이 쳇바퀴를 돈다.


과연 나는 어떻게 결국 좋아진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와 둘이서 나눈 이야기를 상대방이

가서 임의로 퍼뜨리고

그들이 한 패거리가 되는 일을 잘 감당할까.

어젯밤까지 사랑한다고 속삭인 그가

오늘 밤 만나자는 당신에게 '내가 언제 그랬냐?'고

하는 일을 대범하게 넘길 수 있을까.


6급도, 7급도, 5급도 다 '사람'이다.

그들이 좋아한 그 명예와 타이틀을, 잃어버릴 까 봐 죽는 시늉을 하다가 살아남은 순간에

과거는 다 잊겠다고, 새로 출발한다면서

과거에 속한 모든 것을 대용량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는 것을 어떻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까.


그리고 나서라도 편안해져야 할까.


연예인 걱정은 하지 말랬지만,

배우 이선균이 하늘로 갔을 때,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내 알고리즘도 아닌데 그의 사생활에 관한 수많은

숏츠와 연예 방송처럼 꾸며진 영상이

유튜브에 연달아 올라오는 것을 알았고,

정말이지 염려가 됐었다.

'이러다가 이 사람 다칠라. 어떻게 살라는 건가. 이러고도 탈이 난 후엔 모두 숨어 버리겠지.'

우려한 대로 사건이 일어났다.


짧은 순간을 넘길 돈벌이를 위해

남의 인생을 쓰레기통 뒤지듯

파헤친 인간들.

그들은 지금 어디로 숨었나.


'나의 아저씨'(2018년 tvn드라마)에서와 같은 이선균을 다시 볼 수가 없게 됐다. 세상이 왜 이런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보다 많은 세상.

죄를 짓고도, 죄가 아니었으며 자신은 '모르고 한 일'

이라고 말만 번드르르한 인간들.

그 때문에 상처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눈물이

하늘에까지 닿았다.


선을 긋고 금을 치면서 내가 고스란히 병 치료를 위해

나와 그들을 구별해 낸 힘겹고 아팠던 긴 시간들은 내게 무엇을 남겼나.

여전히 내가 아프다면 이 때까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그 노력들이라곤 쓸모없는 일이었을까.


나는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으로 또다시 괴롭다.




결국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이어야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돈이 들어오면 연예인은 비주얼이 달라진다.

돈이 들어오면 일반인도 얼굴이 달라진다.

돈처럼 좋은 것이 없다. 부모님은 손주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면 돈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또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다.

누군가는 그게 '자식과 골프'라고 한다.

누군가는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


나는 내 건강과, 내 삶의 만족도가

나선형을 그리면서 달라진다고 생각하려 한다.

수시로 미세한 조정을 해서

슬럼프를 디뎌야 한다. 

뭘 해도 능력이 수직으로 상승하지 않는다.


수직으로 내 삶이 하강했다고 해서

그것을 수직으로 만회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내가 자주 지치고,

기대에 차지 않아 힘들어 하는 것 같다.


"나는 다 나았으니 이제는 너희들에게서 벗어났어.‘라고 말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구십구 퍼센트?!


후유증도 당연히,

사람을 볼 때마다 내 스스로

'간'을 보려고 찍는 것 같은 끈질긴 트라우마도 당연히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이토록 내가 웃는 것이 웃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고,

그것이 내 마음 속 그늘을 드리울 때


이토록, 내가 나은 것이 아무래도

다 나은 것 같지 않아서,

재발의 두려움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아예 앞날이 꽉 막힌 것 같이 느낄 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여기서 나를 내려놓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은

사랑에 빠질 때 뿐이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사람이 저렇게들 미친 듯이 배신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바쁜 세상에서

다시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그러나 누군가 다른 사람을 혹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열정적으로 내가 하는 일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그 일이, 그 사람이 더 잘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쏟아부을 에너지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리듯 매일 밤, 매일 아침

끌어올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한 순간 더 살아남을 가치가 없도록 처참해진다.


그 점을, 나는 쓰러져 봤기 때문에,

일어나 나갈 수 없도록 다 뺏기고 울어 보았기 때문에

정확히, 명확히 기억한다.


자신에게 자주 실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을 물어야 한다.


왜 실망하는가.

내가 얼마나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기준을 세우고 자기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평가 받으라.

남에게 끌려가지 마시고.

남의 등에 묻지 마시라.


그 때 충분히 사랑했고

일마디 변명 없이 내게 쏟아지는 포화를 다 받았다.

그 사람을, 일을 떠난 것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다.

다 사랑했다.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을 만큼.


내가 열정을 잃어버린 것은 지친 것이고,

지친 것은 다시 회복하면 된다.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남은 것이 얼마나 있는지도 생각하자.


나는 일어나 길을 가면서, 주위를 다시 돌아볼 것이고,

나와 책임을 나눌 사람이 있나 다시 찾아보려고 한다.


시간이 걸린다.

뭘 해도 다 그렇다.

그러니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지 말자.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인생은 내게 주려고 한 것을 아직 다 주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꽃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내가 아직 아픈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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