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준다는 것은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조하문이라는 가수의 노래였다.
오늘 불현듯 생각이 났다.
찾아 보니까 1989년도 노래다.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지?
“어둠을 헤치는 세월은 말없이 흘러만 가는데
지나간 시간이 서러워 한없이 눈물만 흐르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을 만났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드려요
어느덧 구름은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내게로
젖었던 내 마음 마르고 파아란 하늘이 감싸오네
이제는 나는 사랑을 배웠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드려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드려요“
큰일났다. 아침저녁으로 한 번 딱 떠오른 노래 가사는
꼬박 하루는 귀에 밀착해서,
급기야 혼자 흥얼거려 보게 되는데 어쩌나...
내 아픔 아시는 브런치 한 분 한 분이 마냥 좋아서
다음 글을, 또 다음 글을 올리게 되는 요즘이다.
송과장 말고 진짜 ‘송’이 있었다. 우리는 다 그를 좋아했고 나보다 몇 살 위인 그를 내가 좋아했다.
자기 능력 안에서 헤엄을 치든가 물장구를 치든가는 자기의 선택 사항이다.
‘송’은 퇴사를 꿈꾸지만 달리 어떤 꿈을 키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의 ‘성대리’는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내 생각도 있는그대로 다 풀어내는 수준이었다. 특히 좋은 사람에게는.
그래서 ‘송’에게 있는 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 그 모든 얘기를 다 듣고 ‘송’은 다수에게 넘어 가 버렸다. 사는 게 편해지니까 그랬을 것이다.
‘아니 왜 이리 순발력이 좋아?’라는 발견에 더해서
우릴 한 순간에 버리는 그 결단력, 아니 절단력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비록 ‘송’은 그를 써 먹는 ‘G'들보다 머리가 있고 한 수 위였지만, 편이 갈라진 세상에서 힘 센 쪽에 붙어야
편한 걸 터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자신을 좋아해서 마음을 연 ’성대리‘를
보기좋게 ‘G'들이 넉다운 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자기는 살아야 되므로.
나부터 살고 보자는 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서 ‘송’은 성대리 앞에 나서질 못했다.
쪼르르 ‘G'들 뒤에 숨거나 피해 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는 성대리의 마음은 괴롭기만 했다.
그는 ’G‘들이 정말로 좋아서 함께 한 걸까? 또 지금도 자신이 처세를 잘 한 것이 그럴싸 했다고 생각할까?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선 영혼을 빼 놓고 다니라.”던
말이 잘 어울리던 그가,
오늘처럼 과거지사에 머리가 아픈 날이면
그래 놓고선 배시시 웃곤 하던 그가 생각나곤 한다.
물론 마음은 그래도 안 그런 척 할 수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너무 뻔하게 나오면 화도 내고 지적도 해야 하는데 순간 자기에게 뭐가 유리한지를 계산해 내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완전히 책임지지 않으면서
누구도 완전히 비난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도 되는 세상이 아닐 때도, 아니 혼란한 세상일 수록
이 방법은 유효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G'들이, 악인들이, 빌런들이 쉽게 주도한다.
콜센터에 전화를 해 보면
질문에 잘 답하지 못하는 상담원에게 넘어가서
원하는 답을 통화 후에 스스로 찾아야 할 때가 있다.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게
도와 주는 걸까,
아니면 “나도 이 동네는 첨이라서.”라고 말꼬리를 흐리는 게 차라리 나을까.
어설프게 알려 주었다가 헤매기라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나는 말해 왔다.
그럼 혼자 찾기라도 할 게 아닌가.
이 사람에게는 무조건 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제 3의 ‘송’이 내게 그랬다.
우연히 만났지만 처음 만난 날부터 아주 편안했고
이전의 ‘송’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내게 후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마음을 아무리 주었다가도 한 순간 거두어 들이면
상대방은 혼동이 온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러지?’라고 자신을 들볶다가 초췌해질지 모른다.
나중에 그가 내게는 마음이 없었다는 걸 알고,
심각한 자존심 파괴에 몸살을 앓아야
일어설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언제부터였을지 몰라도 ‘힘’의 서열이 매겨졌고
‘힘’에 따라 성의와 존경이 표해졌다.
자본은 또다른 문제로 놓고 보더라도
인간은 사람에게 얼마나 굽힐 것인가를
매일 점수화시키고 살아간다.
마음이 아무리 좋아도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상대방의 비밀스런 이야기나 너와 내가 주고받은 약속 따위는 ‘없던 일’로 된다.
‘나의 쓸모가 없었구나, 나는 형편 없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플레이를 어떤 것도 펼칠 수 없다.
그보다는 사람을 더디게 알고 오래 보면서
그 때 마음을 열어도 늦지 않았다는 걸,
자신이 좀 성급했었더란 정도를
그 페이지만 살짝 접어 두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오고 간 것이 대수냐,
뭐 중요하느냐?“ 하는 사람들이
책임 따위를 알 리 없다 해도 그건 그들의 책임 맞다.
그러니 무조건 해서 마음을 닫지는 마라.
자기 부정에 혼을 뺏기지 마라.
https://www.youtube.com/watch?v=GYNfiv0en-A&pp=ygUe7Lmc6rWs7JW8IOuEiOuKlCDslYTri4gg67aA7Z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