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한 일을 되뇌다.
언젠가 나의 아버지도 공무원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거부해 왔다.
지금까지도 그 서먹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내가 엄마의 바램대로 공무원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일에 매달리면서 아버지가 이해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드라마틱해질 일이 아니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이렇게
붉은 색 계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처럼 각자의 기기를 갖는 시대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각자 번호로 통화하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창 음악 방송이 고픈 시기를 지나가고 있던나로서는 아버지가 주말 등산시 갖고 다니는 저 비슷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보곤 했다.
그런데
자고 나면 없어지고
가져다 듣고선 자고 나면 없어졌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아버지가 말없이 걷어 간 트랜지스터도 말이 없었다.
흔한 “공부에 방해되니 라디오 듣지 말아라.” 라거니
잔소리하긴 커녕 음악을 좋아하는 자식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네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부정했고
자식은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했다.
아버지가 식사 중이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밥을 굶고 자는 척 하길, 수도 없이 하곤 했다.
라디오가 아니었으면,
아버지 것을 가져다 쓰지도 않았을 자식은
외견상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외탁*을 했다.
*외탁: 외가 쪽을 닮음.
아버지를 닮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면서 아버지를 마주치지 않은 자식은 생각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엄마가 돈을 주어야 했다.
집에 왔는데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셨다.
갈 데를 가지 못했다. 취미로 배우라고 불러 주신 선생님 화실에 가려면 버스비를 타야 했다. 취미가 본업이 될라 지레짐작으로 걱정하신 엄마가 버스비를 끊었다.
걸어가기엔 먼 거리였다. 지금 생각해선 그 때 자전거가 있었으면 타고 갔을까 싶지만 자전거조차 없었다.
공무원이란 그 때 나에게, 엄마에게
‘가난’과 같은 말이었다. 집에 돈이 떨어지고
엄마는 식료품을 외상으로 거래하고 아버지가 월급을 타시면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집안을 통틀어서
아버지가 숨겨놓은 저 한 개 뿐이었다.
지금 나는 다시 아버지를 만난다. 어쩌면 엄마를 만나기 위해 엄마가 같이 살고 계시는 아버지를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렇게 엄마에게 ‘더부살이’시지만 한껏 목소리만 크시다.
엄마가 절약이 몸에 배어 지금도 동전을 세서 계산을 치를 때 아버지는 자신이 재직한 시절의 일화를 몇 십 개의 레퍼토리로 읊으신다. 그 때도 아버지는 양복을 맞춰 입으시고 소매 끝이 반들반들해지도록 입으셨다. 자부심이 강하셔서 과거 회상적이시다. 못 말린다.
집에는 돈이 떨어져서 없고, 자식은 꿈을 잃고 방황했으며 배우자인 엄마는 아직도 남대문 시장에 가셔야지 옷을 한 가지 사 입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죄를 짓’지 않고 사셨다고 목청이 높으시다. 그 땐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었다고 모든 걸 강변하신다.
이젠 끝날 때까지 듣기만 한다. 작년에 길에서 넘어지신 후로 다시 안 넘어지시기만 신신당부한다.
늘공이 된 나. 공개채용시험을 보았다.
부모님의 권유였다. 선택지가 많이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지 않았을 것을 안 지도 꽤 됐다.
어느 순간 세상이 바뀌면서 지자체 수장이 선출직으로 바뀌었고 늘공인 나는 일만 늘었을 뿐
‘내 것’이 모이지 않아서 괴일* 것이 없는 상태가 왔다.
* 괴다: 기울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아래를 받쳐 안정시키다.
인맥도 간당간당하니 불안했고
돈도 간당간당했다. 일을 하려니 사람들이 흩어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왕따당했다.
물론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모르신다.
그리고 동료 중에는 퇴직 후 돌아오신 분이 있다.
나는 경로를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분이 또 일의 진행이 파란만장하다. 민원인을 대할 때, 속전속결이 신조인 건지, 돌아오셔서 그런지
근래 보기 드물게 위압적이다.
옆자리 늘공, 나는 심박이 빨라진다.
‘왜 돌아왔을까?’ ‘역시 ‘돈’이려나. ‘본능’적으로 회귀했으려나‘ 잡 생각이 많아진다.
위로는 선출직에, 옆으로는 일에 관심 없거나 욕심으로 뭉쳤거나 , 상사들 보이는 데서만 활발한 일꾼들에다가, 돌아온 ‘고성’의 퇴직자들까지 합해졌다.
: 오늘 나의 현장이다.
먼 산을 보고, 다시 모니터를 본다.
행정은 사람에게서 출발하고, 사람과 사람이 연합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라야 미래 변화를 담지할 수 있다는
오랜 ‘성대리’의 신념이 잘못되서 그런지,
장마철 뒤숭숭하게스리 신문지로 덮힌
수산물 좌판 같다. 거기 뭐가 들었는지 냄새로 아는데
안 보인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오직 천륜으로 지탱되고
어느 마지막 날에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실 텐데,
변함은 없을 것을 아는 나는 이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