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Jul 21. 2024

60. 아버지 공무원

- 자신이 한 일을 되뇌다.

 

언젠가 나의 아버지도 공무원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거부해 왔다.

지금까지도 그 서먹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내가 엄마의 바램대로 공무원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일에 매달리면서 아버지가 이해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드라마틱해질 일이 아니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숨바꼭질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이렇게

붉은 색 계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아래)

https://m.search.naver.com/search.naver?ssc=tab.m_image.all&where=m_image&sm=mtb_jum&query=%ED%8A%B8%EB%9E%9C%EC%A7%80%EC%8A%A4%ED%84%B0+%EB%9D%BC%EB%94%94%EC%98%A4#imgId=image_sas%3Anshopping_12548f9c401602840714761ef03b2625


지금처럼 각자의 기기를 갖는 시대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각자 번호로 통화하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창 음악 방송이 고픈 시기를 지나가고 있던나로서는 아버지가 주말 등산시 갖고 다니는 저 비슷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보곤 했다.


그런데

자고 나면 없어지고

가져다 듣고선 자고 나면 없어졌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아버지가 말없이 걷어 간 트랜지스터도 말이 없었다.

흔한 “공부에 방해되니 라디오 듣지 말아라.” 라거니

잔소리하긴 커녕 음악을 좋아하는 자식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네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부정했고

자식은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했다.

아버지가 식사 중이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밥을 굶고 자는 척 하길, 수도 없이 하곤 했다.


대화는 한 마디가 없는 아버지 -자식사이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만 왔다갔다 했을 뿐이었다.,

라디오가 아니었으면,

아버지 것을 가져다 쓰지도 않았을 자식은

외견상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외탁*을 했다.


*외탁: 외가 쪽을 닮음.


아버지를 닮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면서 아버지를 마주치지 않은 자식은 생각했다.


했던 말을 또 하는 옛 공무원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엄마가 돈을 주어야 했다.

집에 왔는데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셨다.

갈 데를 가지 못했다. 취미로 배우라고 불러 주신 선생님 화실에 가려면 버스비를 타야 했다. 취미가 본업이 될라 지레짐작으로 걱정하신 엄마가 버스비를 끊었다.

걸어가기엔 먼 거리였다. 지금 생각해선 그 때 자전거가 있었으면 타고 갔을까 싶지만 자전거조차 없었다.


공무원이란 그 때 나에게, 엄마에게

가난’과 같은 말이었다. 집에 돈이 떨어지고

엄마는 식료품을 외상으로 거래하고 아버지가 월급을 타시면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집안을 통틀어서

아버지가 숨겨놓은 저 한 개 뿐이었다.


지금 나는 다시 아버지를 만난다. 어쩌면 엄마를 만나기 위해 엄마가 같이 살고 계시는 아버지를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렇게 엄마에게 ‘더부살이’시지만 한껏 목소리만 크시다.

엄마가 절약이 몸에 배어 지금도 동전을 세서 계산을 치를 때 아버지는 자신이 재직한 시절의 일화를 몇 십 개의 레퍼토리로 읊으신다. 그 때도 아버지는 양복을 맞춰 입으시고 소매 끝이 반들반들해지도록 입으셨다. 자부심이 강하셔서 과거 회상적이시다. 못 말린다.


집에는 돈이 떨어져서 없고, 자식은 꿈을 잃고 방황했으며 배우자인 엄마는 아직도 남대문 시장에 가셔야지 옷을 한 가지 사 입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죄를 짓’지 않고 사셨다고 목청이 높으시다. 그 땐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었다고 모든 걸 강변하신다.

이젠 끝날 때까지 듣기만 한다. 작년에 길에서 넘어지신 후로 다시 안 넘어지시기만 신신당부한다.



‘늘공’ 다시 돌아오다



늘공이 된 나. 공개채용시험을 보았다.

부모님의 권유였다. 선택지가 많이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지 않았을 것을 안 지도 꽤 됐다.

어느 순간 세상이 바뀌면서 지자체 수장이 선출직으로 바뀌었고 늘공인 나는 일만 늘었을 뿐

‘내 것’이 모이지 않아서 괴일* 것이 없는 상태가 왔다.


* 괴다: 기울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아래를 받쳐 안정시키다.


인맥도 간당간당하니 불안했고

돈도 간당간당했다. 일을 하려니 사람들이 흩어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왕따당했다.

물론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모르신다.


그리고 동료 중에는 퇴직 후 돌아오신 분이 있다.

나는 경로를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분이 또 일의 진행이 파란만장하다. 민원인을 대할 때, 속전속결이 신조인 건지, 돌아오셔서 그런지

근래 보기 드물게 위압적이다.

옆자리 늘공, 나는 심박이 빨라진다.

‘왜 돌아왔을까?’ ‘역시 ‘돈’이려나. ‘본능’적으로 회귀했으려나‘ 잡 생각이 많아진다.


위로는 선출직에, 옆으로는 일에 관심 없거나 욕심으로 뭉쳤거나 , 상사들 보이는 데서만 활발한 일꾼들에다가, 돌아온 ‘고성’의 퇴직자들까지 합해졌다.

: 오늘 나의 현장이다.


먼 산을 보고, 다시 모니터를 본다.

행정은 사람에게서 출발하고, 사람과 사람이 연합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라야 미래 변화를 담지할 수 있다

오랜 ‘성대리’의 신념이 잘못되서 그런지,

장마철 뒤숭숭하게스리 신문지로 덮힌

수산물 좌판 같다. 거기 뭐가 들었는지 냄새로 아는데

안 보인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어느날 “라디오 치우셨어요?”라고 어린 내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못 봤다.”고 하셨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오직 천륜으로 지탱되고

어느 마지막 날에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실 텐데,

변함은 없을 것을 아는 나는 이제 괜찮다.



세상은 좋아졌다.


작가의 이전글 59. 멀어지면 뭐가 보이는가 하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