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eat: 기절할 정도로 쓰러지는 날의 연속.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정된 시간과 미약한 두뇌”를 언급했다.
요즘 통 독서가 진척이 없다. 책이 머리맡에 쌓이는데 내가 앉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가만 있지 못하는 병’ 에 걸린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으려고 하면 이미 하루가 ‘기절할 만큼’ 피곤한 시각까지 막을 내려 있기 때문이다.
스가쓰케 마사노부의 저 언급이
내게 소중한 변명이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쓰려면 읽어야’ 한다는 전제는 바뀔 수 없으니 분발이 요망된다.
오늘은 이 책이 글의 요소요소에 영향을 미칠 예정이다. 제목부터가 ‘앞으로의 교양’이라서 더더욱 그렇다.
‘내가 그 때도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서 ‘지금 하게 됨으로써’
역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게 되네?’ 하더라도
제품 디자이너로서 위 책 대담에 출연한 ‘후카사와 나오토’가 그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이 평범해 보이면 ‘뭐야 평범하잖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잘 보니 꽤 괜찮네!’로 바뀐다. 그것을 ‘슈퍼 노멀’이라고 한다고 말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못 할 줄 알았는데
몰입과 비상한 노력으로 해 냈을 때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이 ‘수퍼 노멀스럽게’ 된다.
스스로가 ’꽤 괜찮아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시간상, 여건상, 남의 눈치상
요래조래 미루어 본 기간이 길수록,
즉 늦게 시작할수록 ‘해 내는’ 데 쏟는 에너지와
따르는 내적/외적 ’부상‘이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던 시간에 안 자고 있게 되며
쓰지 않던 신경과 특히 근육을 다 구동시키니까.
소심하고 근시안이었던, 앞만 보고 충성스러웠던
‘성대리’ 시절 부러워만 하고, 바라만 보면서
‘저건 남의 일이야.’ 라고 손사래 친 나는
내가 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따져 보고
하니까 결국 재밌고 즐겁고 신이 나는 일들만
하기 시작했다. 독서도 신나고 즐거운데 하물며
자기 자신이 슈퍼 노멀 같이 느껴지는 일은
꼭 해야지, 안 해 보고 죽어선 안 된다.
그런데 힘들다.
이건 집에 와서 ‘잠드는’ 게 아니라 ‘기절해’ 버린다.
아침엔 또 ‘죽었다가 깨어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아무 컨텐츠가 없고 알멩이는 빠져 있다.
사람도 그렇고 하는 일도 그랬다.
그러니 근속 기간이 길어질수록 변화는 목이 말랐다.
안 그렇겠는가. 어제 하는 일이 오늘도 똑같고 내일도 그 일을 할 거라면?
‘삼시세끼’라는 연예인 밥 해 먹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출연자들이 하루 세 때 똑같은 음식을 해 댔더라면 그 시청률이 나왔을 리 없잖은가.
변화를 주고 변신을 꾀했다가
저 ‘왕따’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나서
너는 어떻게 살았니? 다시 어떻게 이만큼 올라왔니?
사람들은 궁금할지 모른다.
내게는 가만히 옆을 지키는 ‘수호자’들이 있었다.
위 책에는 ‘사회 관계 자본’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셜 캐피털이라고 하는, 결국 주위에서 ‘신뢰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옆을 지켰냐는 것이다.
‘성대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내가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과장과는 ‘성대리’가 비할 수 없는 사람이며
과장처럼 넘보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시 일어나서 페이스를 찾을 거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 모로 시사해 주는 사람들.
그들 몇몇이 든든해서 나는 ‘더 잘 살 수 있다’는 응원을 받았던 것 같다.
‘성대리’가 울면서 말할 때 고개만 끄덕여 준 사람들.
내가 ‘자력갱생’한 건지
찾아와 ’밥을 먹여‘ 준 ’사회 관계 자본‘이 살린 건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 사뭇 헷갈린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저 자본도 자본 축에 드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환금성이 매우 저조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