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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Aug 04. 2024

64. ‘안 된다’고 안 한 일들의 총합

- Feat: 기절할 정도로 쓰러지는 날의 연속.


이번 주엔 이 책을 읽었다.

‘앞으로의 교양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지식 11강 (스가쓰케 마사노부, 2019년)’.


이미지 출처: https://m.yes24.com/Goods/Detail/69062759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정된 시간과 미약한 두뇌”를 언급했다.

바로 나다!

요즘 통 독서가 진척이 없다. 책이 머리맡에 쌓이는데 내가 앉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가만 있지 못하는 병’ 에 걸린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으려고 하면 이미 하루가 ‘기절할 만큼’ 피곤한 시각까지 막을 내려 있기 때문이다.

스가쓰케 마사노부의 저 언급이

내게 소중한 변명이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쓰려면 읽어야’ 한다는 전제는 바뀔 수 없으니 분발이 요망된다.

오늘은 이 책이 글의 요소요소에 영향을 미칠 예정이다. 제목부터가 ‘앞으로의 교양’이라서 더더욱 그렇다.





“나는 못 해.”,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야.”



지금 내가 멀쩡하게 하고 있는 일들이

언젠가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못하고 있던

그 일이라면?

결과는 하나다. 엄청나게 몰입된다.

‘내가 그 때도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서 ‘지금 하게 됨으로써’ 

역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게 되네?’ 하더라도

조급해지는 것 주의, 감동은 나눠서 할 것!


제품 디자이너로서 위 책 대담에 출연한 ‘후카사와 나오토’가 그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이 평범해 보이면 ‘뭐야 평범하잖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잘 보니 꽤 괜찮네!’로 바뀐다. 그것을 ‘슈퍼 노멀’이라고 한다고 말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못 할 줄 알았는데

몰입과 비상한 노력으로 해 냈을 때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이 ‘수퍼 노멀스럽게’ 된다.

스스로가 ’꽤 괜찮아 보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시간상, 여건상, 남의 눈치상

요래조래 미루어 본 기간이 길수록,

즉 늦게 시작할수록 ‘해 내는’ 데 쏟는 에너지와

따르는 내적/외적 ’부상‘이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던 시간에 안 자고 있게 되며

쓰지 않던 신경과 특히 근육을 다 구동시키니까.


소심하고 근시안이었던, 앞만 보고 충성스러웠던

‘성대리’ 시절 부러워만 하고, 바라만 보면서

‘저건 남의 일이야.’ 라고 손사래 친 나는

내가 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따져 보고

하니까 결국 재밌고 즐겁고 신이 나는 일들

하기 시작했다. 독서도 신나고 즐거운데 하물며

자기 자신이 슈퍼 노멀 같이 느껴지는 일은

꼭 해야지, 안 해 보고 죽어선 안 된다.

그런데 힘들다.

이건 집에 와서 ‘잠드는’ 게 아니라 ‘기절해’ 버린다.

아침엔 또 ‘죽었다가 깨어난다.‘

기분이 좋다!





내가 살은 건지

사람이 살려낸 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쎄고 쎈 공무원. 이게 나다. 나였다.

아무 컨텐츠가 없고 알멩이는 빠져 있다.

사람도 그렇고 하는 일도 그랬다.


그러니 근속 기간이 길어질수록 변화는 목이 말랐다.

안 그렇겠는가. 어제 하는 일이 오늘도 똑같고 내일도 그 일을 할 거라면?

삼시세끼’라는 연예인 밥 해 먹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출연자들이 하루 세 때 똑같은 음식을 해 댔더라면 그 시청률이 나왔을 리 없잖은가.


변화를 주고 변신을 꾀했다가

저 ‘왕따’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나서

너는 어떻게 살았니? 다시 어떻게 이만큼 올라왔니?

사람들은 궁금할지 모른다.

내게는 가만히 옆을 지키는 ‘수호자’들이 있었다.


위 책에는 ‘사회 관계 자본’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셜 캐피털이라고 하는, 결국 주위에서 ‘신뢰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옆을 지켰냐는 것이다.


‘앞으로의 교양’ 256쪽 : ‘이치로 가와치’의 사회 관계 자본 이야기.


‘성대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내가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과장과는 ‘성대리’가 비할 수 없는 사람이며

과장처럼 넘보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시 일어나서 페이스를 찾을 거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 모로 시사해 주는 사람들.

그들 몇몇이 든든해서 나는 ‘더 잘 살 수 있다’는 응원을 받았던 것 같다.


과거에 묶여 있는 행정은 결국 뒤쳐질 일만 남았고, 그렇게 일하는 데서 자신이 ‘빠삭’하다고 우쭐대는 이들은 결국 제 살을 깎아 버릴 뿐, 그건 능력이 아니고

무능함이며 부끄러움이라고

‘성대리’가 울면서 말할 때 고개만 끄덕여 준 사람들.

그렇게...

‘조용한 후원’을 통해서 살아났던 것 같다.


내가 ‘자력갱생’한 건지

찾아와 ’밥을 먹여‘ 준 ’사회 관계 자본‘이 살린 건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 사뭇 헷갈린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저 자본도 자본 축에 드는지

몹시 궁금하다. 환금성이 매우 저조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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