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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Sep 08. 2024

74. 너무 늦었잖아요

-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는,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미안했다.

나는 그렇게 그 사람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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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미안하다고.

이제 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자신이 너무 힘들어서 ‘성대리’를 생각할 수 없었다고.

그가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힘든 게 제일 크지.

나는 조목조목 짧게 나누어서 그가 나를 해친 포인트를 말해 주었다.

그것은 ‘외면’이었다. ‘네가 어떻게 되든지 나랑은 상관이 없어.’라고 하는.

나에 대한 ‘밀어내기’ 인사는 그 마음에서 시작됐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맞잡은 까닭, 한 배에 오른 까닭은

‘해치지 않는다.’는 강한 믿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먼저 손을 놓은 사람만이 나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안다. 먼저 손을 놓을 만큼 내가 무가치하다는 것이니까.

손을 놓고 나면, 내 경험상, 나를 해친다. 가담하니까, 동조하니까.


그 땐 그랬다. 가장 큰 울음으로 그를 옹호한 사람도

나였고, 그의 불운을 내 것처럼 생각한 사람이 되었다.

그 다음에 올 일은 흔한 우산도 없이 모두 내리는 비를 맞아야 했을지언정,

그 때 그는 자신은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굳이 ‘시간을 내’ 달라고까지 해서,

하필 내 앞에 앉아서.




이쯤 되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아셨을 게다.

자기 마음의 평화!


“누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라고 내가 묻고

그는 놀란다. 누가 무슨 말을 했음직하다.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사과를 하라고 하기 전에는 피해 다니게 되는 일이다. 특히나 이 년이라는 시간까지 경과되고 난 후면.


이후로는 본인의 거취와 그를 배후지원하는 사단에

대한 이야기다. 사과를 했더니 마음이 놓이는가 보다.

쓰윽~ 원망 섞인 말도 꺼내 본다.

“나한테요?” 하니까 말꼬리를 자르고 넘어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득 ‘사과’해 버리고

자신의 묵인과 외면으로 남의 일생에 어떤 바퀴자국을 찍었는지 깊은 사고가 없다는 점이

그 사람의 한계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람을 버리고’

자기만 살아남는다. 강해진다. 모든 건 ‘내성’이니까.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라는 마음일 때도

사람은 자기 자신은 챙기고 있다. 거기까진 그럭저럭.

‘인연은 소중한 거야.’라고 말하던 자가

어려워지면 ‘악연이군.’이라면서 자기만의

A-B-C 등급을 나눈 후 ‘C'부터 손절한다.


그러니까 나는 ’C'였다. 나를 ‘C'로 분류한 사람을

지키고 있느라고 모욕을 당해도 나는 당시는 몰랐다.

그도 ‘A'와 ’B'의 일부와는 연락을 끊지 않았다. 평생을 인맥 관리에 의지해 살아온 이들이 길게 살아남는다.

그들로 인해 내 가치를 알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연락을 함부로 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경험상.

“그래도 그건 잘못한 거다.”라고 말하자,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내 귀를 의심해 봤다.

‘사과’를 주절이 주절이 간신히 하더니만

이번에는 나에게 ‘사과를 전해 달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그런 건 전하는 게 아니에요.”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하기 싫고 아직도 내가 자신의 부하 같다. 귀찮은 일은 시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시켜서 사과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텐데 아쉬웠다.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도배하지는 말아야겠다.


사람은 ‘생사’가 가장 중요하다. 생존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먹고살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고 산 사람들-부모와 다른 가족들, 많은 스스로 맺은 인연들-을 챙긴다.

뭔가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많다라고 생각되도

중간정산하고 나면 새로 세팅하지

사람을 힘들어서, 귀찮아서, 제 식대로 마구 끊고

자기 때문에 어려워진, 또는 망한(?) 사람을 이 년 동안 팽개치지 않는다.

“너도 거기 있었잖아?‘라는 말로 해치려고 해선 안 된다. 약하다고 생각해서 물어 버리듯이 굴어선 안 된다. 사람은 겉보기와 다른 부분이 상당수 있는 법이니까. 내 경험은 그랬다.


이제 모든 일이 어떻게 맞아 떨어졌는지가 맞춰졌다.

사람의 진면목을 알고 나면 차라리 결정이 쉽다.

확인까지 시켜 주었으니 무얼 지체할까.

영낙 없는 ‘속물’인 것이고 외피만 인간이었지.


너무 늦은 사과를 하게 한 것이 누구랄 것도 없이

너무 늦은 사과를 할 거라면 ‘자숙’하는 게 나았다.


어떤 일을 해도 진심으로 미안해 한 적이 없는 그들,

남을 위해 비싼 밥 먹고 울어 볼 생각이 없는 자들이

바글바글하다는 세상의 원리를 깨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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