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차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 된 것이려니.
그간의 내 글은 어두움이 많았다.
당연히 독자를 연상하는 입장의 Writer(감히 작가라고 못 쓰겠다.)로서
내 힘듦과 삶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일을
글쓰기에서 유의한다는 생각도
이제쯤은 들기 시작한다.
한 주간 소송이니 증거 확보니 해서 마음이 편치 않고 어수선했다.
게다가 몸이 빠르게 알아차리고
'그로기' 상태를 만들어 주니
마음이 먼저 지쳐 버리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근황이다.
며칠 전부터 '나는 왜 이렇게 선택했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구했고
마음 속에서 답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이건, 네 인생의 마지막 기회야.'라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또
도전했지만 좌절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을
되풀이한다면
아마 나는 '너는 역시 그것 밖에 안되는 사람!',
‘그러니까 너는 사람들이 모두 스킵한 거야.'라는
그들의 목소리, 그 기억들을 내적으로 되새김질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다 꺼내 놓고 좌판을 벌려야 할 때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의 '아픈 것을 반추하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과정'은 가야 할 길이다.
물론 말했듯이 '포기'의 유혹은 너무나 *밤그림자처럼 길고 강렬하다.
* 1990년대 리처드 기어가 나온 한 미국 영화의 영어
제목은 'Internal Affairs'였는데
국내에서는 제목을 '유혹은 밤그림자처럼'이라고
저렇게 지었다.
어쩌면 'Affair'가 시사하는 내용에 대한 국내 정서가 다르고 해석이 분분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의 영어 제목은
딱 그냥 'Decision to leave'다.
나를 찾고 내가 진짜 나를 알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간 험난한 시간을 보내오며
나를 버리고 간 사람도 많았고
나를 찾아온 사람은 적었다.
인간은 자연의 한 존재이고
힘이 기울고 물이 한번 아래로 흘러가면
만사가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돌아보면, 나는 그들과 뒤섞여 살았던 시간과
거기 쏟았던 내 에너지에 대한 미련이 큰 편이었다.
상처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그 시간과 전연 헤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연신 뒤 돌아본 것이다.
이번 '포기의 유혹'을 떨쳐내기로 한 이유로는
바로 그들과 '헤어질 결심'이 분명 있었고
인생의 연속적으로 이어진 패배를 '끊어내는'
힘든 과정이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쉽지가 않지요.
하지만 뭐든 쉬운 일이 있던가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저는 남은 인생을 원망과 한탄만으로 살아가게 되요.
그건 정말 '바라지 않는 결과'죠.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내가 즉각적으로 느낀 감정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좋은 걸 기다릴 수 있고 여유를 갖게 되려면
더이상 아픔을 간직한 채
주변인들을 힘들게 하고 결국 손을 내미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게 할 거에요.
끝내는 헤어질 것인데
나 자신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직관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음에 올 삶의 행복도를 좌우해요. )
나는 저러한 생각을 갖고 지금 내가 와 있는
위치와 좌표를 다시 재 보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나를 괴롭힌 사람들과 그 기억을
진정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시절의 나에 대한, 도가 지나친
미련과 애착이 변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으로써 무엇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득이 없고 실만 있는 그런 시선으로 나 자신을 더이상 바라보기 싫다,
고 결심했다.
폭락론과 상승론이 서로 밀치고 나아가려고 하는데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아득하기만 하다면
우왕좌왕 하다가
우리는 '내가 이게 맞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루에도 몇번 씩이나
하나씩의 가격을 치르고 물건을 획득하지 않는가.
무엇에 관한 것이든
반드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을
선택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당혹감
('꼭 선택해야 돼?'와 같은 생각들)이나
선택 이후 밀려드는 후회심리, 채워지지 않는 만족도 때문에 힘들어질 것을 예상하는,
그래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행복하게 살아갈 확률은 많지 않다고 본다.
나는 둘 이상 여러 개의 선택지에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만 선택과 판단을 개인의 몫으로만 볼 때
그래서 저와 같은 원칙(첫째 의리, 둘째 완주,
셋째 긍정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을 세우고
내게 일어날 일들을 맞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누구를 만나서 어떤 주장을 펼치든지
원칙과 기준만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OO(예: 판사)라면 어떻게 볼까?
어떤 것을 가져오라고 할 것이며 나를 얼마나 믿어줄까?'와 같은 생각을
확률이 각각 다른 게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나를 짓누르고 있던 '번거로움'에 대한 기피,
'거절당함'에 대한/미지의 사람을 대면해야 하는 일에 대한 공포 등으로부터 눌림받고 있던
구속과 억압이 뚜렷이 작아졌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난 후의 나를
상상해 보고 나서
나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과업이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에 제시한 내 '기준'에만 맞는다면.
글씨를 못 쓸 수는 있다.
나도 악필이다. 노트북을 사랑할 만큼.
하지만 다른 사람이 판독하기 어렵다고 다시 써 달라고 하면 "내가 왜 그걸 해 주어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존경받는 고소득 전문직...
자기 만의 아성이 확고하다.
나는 그렇게 되기는 싫다, 물론 이제 공부해서 될 수도 없지만.
내가 브런치에서 언급했던
이니셜 A부터 시작한 등장 인물들은 모두 실재한다.
내가 그들이 내게 저지른 일,
내가 그들에게 반격도 못 해 보고 끝난 일은
모두 쓴 대로이다.
"이걸 꼭 글로 써야 했나?"라고 물으신다면
내 대답은 "예."이다.
이유는 사람의 기억이 생각보다 훨씬 나쁠 수가 있기 때문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거나 현재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문화에 '태움'이란 것이 있다고
일찌기 알려졌다.
나는 비록 태움 문화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내게도 조직 내부의 강렬한 지우개로
내가 지워지는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근처까지만도 상상을 못 하고 있었을 때다.
https://brunch.co.kr/@overflowtou/27
사람이 타 죽는 것이 불에 타 죽는다고 생각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 비로 ‘고통으로 인한 쇼크'로 죽는다는 말을 위 글의 작가님이 써 놓고 계셨다.
경험자로서 공감이다.
나는 바로 그것을 ‘충격과 공포’라고 표현했다.
게다가, 당신들 때문에 내가 아프다고 하면 모두들
손사래를 치기 바쁜 집단주의가 횡행하는 공직에서
만연한 따돌림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따돌림과 ‘아픈 마음’ 둘 다가-
병원에 가면 설문식 문진표를 작성할 때가 있다.
'당신의 통증은 10 중의 몇 정도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아직 10 중의 0이나 1이라고 할 수가 없다.
고로 나는 아직 아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위기를 내 인생의 최대 위기가 아니라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가짐을 바꾸라는 뭐 그런 말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반드시 이 터널을 빠져나간 후라야 그것들을 맞이하고 내 일로서 삼을 수가 있다는 것을
나의 몸과 마음이 모두 깨닫고 있고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다.
견디고 견디어라.
그리고 난 뒤에 빛을, 드디어 빛을 안고 살아가라.
지치고 힘든 '태움'이 만연한 간호사,
그리고 여타의 조직에서 그로 인한
맘 고생으로 온 몸이 불어터질 것 같은 사람들에게
같은 터널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방향'이 무엇 무엇인가를 제시해 보이고자
이 글의 발행을 누른다.
그리고 오늘 글을 쓰려고 할 때
‘자기만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잘 풀어 주신
‘송지영‘ 작가님의 덕에
글이 술술 나왔음을 밝힌다.
https://brunch.co.kr/@summer20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