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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Oct 23. 2024

87. 통증의 이식

- ‘사랑’이 없는 마음 가지고선 통증만 옮겨다닐 뿐.



입장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



바꿔서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려면

상대방의 입장을 '그게 나'라고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이 되질 않는다.

나는 절대, 저얼~~때

‘저 미운 사람'과 같은 입장이 될 리가 없고

따라서 그 사람이 지금 힘든지, 지금 아픈지, 괴로운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나마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픈 거냐고 물어보면

‘꽤나 양반'이다.


나는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이 고통을 누가 좀 가져가 주었으면

생각해 봤다.


사람들은 “울렁거리는 게 대수냐?” 할 수 있다.

울렁이고 메스꺼워 토할 것 같고

눈 앞이 빙빙 돌게 되는

시각적이면서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내 몸은 대단히 민감하게,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명치 부근이라고 생각된다.

거기가 나의 울렁거림의 출발점이다.

불규칙한 움직임에 대한 신체 반응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와 닿아 하질 않는데

‘멀미'라고 하면 다들 안다.

그 특유의 구역감과 어질어질함 말이다.

급하게 회전하는 놀이 기구를 타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게 온다.

그 날들이 있고 난 뒤에

나는 사람에게 특히 취약해졌다.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장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무언가 언성을 높이는 대화가

내 눈 앞에 다시금 떠오르면

나는 영낙 없는 3D 멀미처럼

메슥거리고 명치 저 끝에서부터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이 익숙하고 이물스러운 몸 속 불균형이

나와 내 생활의 균형을 흐트리고


나는 심호흡으로도 또는 딴생각으로도

어쩔수 없어 조제약 ‘보나링’ 두 알을 삼킨다.

시간이 지나

하루가 막을 내리고

하루 어치의 피곤함 만큼

짙게 눈그늘이 내려앉을 무렵

약을 먹을 필요가 없는 저녁이 온다. 지금처럼.



그들 대신 내가 아팠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부모는 아이가 밤새 열이 안 내리고

열두 번도 더 아이 이마를 짚어 보며

병원 문을 여는 시간만 기다리다 보면

저절로 말이 나온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겠어야.”


대신 아플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당장 고통에서 구해 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내가 아프고 아프면서

그들이 나를 아프게 했다는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들은 자기가 아프기 싫어서 나를 아프게 한 것이었다.


즉 나는 원래가 ‘그러려니가 되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는 없겠으니

차라리

“아이야, 네가 와서 차라리 한 대 맞자.”

이렇게 된 것이다.


”너는 아파 본 놈이니 아싸리 네가 아프다 죽는 거이 어떠냐?“


나는 그렇게 남들에 의해 그 무섭다는

잃어 버릴 게 없는 사람’으로 조작되었고

잃어서는 안 될 밸런스, 몸의 바른 상태, 건강을 잃었다.

자신들이 살아 온 태도

일하(지 않)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를 유지하고 매달려 버티는 데 특화된 그들은


내가 아프거나 죽거나 매한가지였다.

자신들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안정화된 삶을 바꾼다는 생각은 애당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있는다면 나는 계속 아파야 했다.

아무것도 바꿀 것이 없으며

자신들이 살아 온 대로 살아갈 그들은

나의 새로움이 자신을 해친다고 생각한 순간


잔뜩 움츠렸으며

표정엔 하나 드러나지 않았지만

뒤로 두른 두 손을 재빨리 움직여 자신의 편을 규합했다.



고통은 n분의 일이 안 된다.



누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예감했었다.

그가 자질이 없으면서 운이 좋았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편한

특정 편파에 기울어서

모양새부터 기울어진 배로 만들어 놓는 데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다.

예컨대 그는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저 환자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라고

하면서 구조를 결정하려고 했다.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했다. “그 때 나는 여기에

없었잖아?”라고 아픈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정체성을 상실했는데

그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굴어야 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투명인간’은 투명한 인간이 아니다. 속까지 비치는

투명한 사람이 나도 또한 되어 본 적이 없다.

타의에 의해 투명인간은 한번 되어 보면

자신의 미래를 점칠 수가 없을 만큼 막막해진다,


자신이 아프거나 잃지 않는 선택을 하려고

인간은 살아간다.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고,

고통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느끼지 않는 통증에

무관심하다. 별 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프게 되면 발병한 원인 제공자는

사라져 버리고

아픈 사람과 아픈 병만 남게 된다.


세상에 좀더,

아픈 사람을 두고서

‘저 사람이 앓고 있음으로써 내가 아프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좀더 많아진다면,


통증만이 이식되며

‘공중에 갇히어’ (김덕근 시인 시집 제목 참조) 있는

이사람과 저사람이 제각각 아픈 세상사가 달라질 텐데


아직도 우리 사회, 남들을 쉽게 손가락질하며

익명이라고 해서, 자신이 누군지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갈겨버린 막말 난사로

사람이 누구 하나 이세상을 떠나도

아무도 “내가 그랬네!” 인정치 않고


아픈 사람을 보고 내가 문병을 하는 것이

내 인맥 관리에 유리한지 아닌지 따져보고

띄엄띄엄 사람을 솎아내는 사회가 아닌지.


내가 온 땅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아프다고

아파서 죽겠다고 할 때

저 통증은 자신과 무관하다고만 되뇌이던

사람에게 생긴 모양만 다른 통증은

결국 내가 아팠던 그것의 변형이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시한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다른 사람의 암보다 내 감기가 중한’ 인간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

내가 얼마나 아팠던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아프길 바래서도 안 되겠다.


간 이식처럼 무슨 장기도 아닌 것이

통증은 서로 간에 이식되고

모두가 제 병만 끌어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한마디,

‘남의 병을 생각할 때

제 병이 만만하게 다룰 만 해 진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게 어때요?‘

라고 남기고 싶어서 썼다.



똑같은 하늘 같지 않지만 하늘은 똑같다. 사람 마음이 문제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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