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설 이야기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창 밖을 바라본다.
일기예보가 맞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점심때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이, 어디에선가 등장한 시커먼 먹구름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쪽빛같이 푸르렀던 하늘이 어둠으로 뒤덮인 것이다.
나는 다시 시선을 책상 앞으로, 정확하게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문법책으로 돌린다.
be used to ~ing ~에 익숙하다
be used to 동사원형 ~에 사용되다
used to 동사원형 ~하곤 했다
사실, use 활용법은 중학교 때부터 지금, 재수생의 입장이 될 때까지. 거짓말 좀 보태면 천번도 더 넘게 공부했던 거고 오백번도 더 넘게 설명을 들었을법한 것이다.
“....”
한번 읽고 써 보았다. 외워지지 않는다.
“........”
세 번 읽고, 써 보았다. 역시 외워지지 않는다.
“............”
n 번 읽고. 읽고. 읽고. 쓰고. 쓰고. 쓰고. n을 무한대로 보내 보았다. 역시나 외워지지 않는다.
“............................................”
짜증이 난다.
정신을 좀 차릴까 해서,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다.
이제 좀 집중이 되겠지. 다시 책상 앞에 앉아서 문법책을 바라본다.
“............”
큰일이다. 세수를 하면서, 겨우 새겼던 문법까지 같이 비누칠을 해버렸나보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오직 하얀 종이뿐.
“휴.......”
결국, 또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안절부절, 먹구름 투성이인 하늘. 조금만 있으면 시원하게. 울컥 쏟아질 것 같던 비가, 삼년 묵은 변비라고 걸렸는지 아직도 뭐 마려운 얼굴로 잔뜩 인상만 구겨댄다. 가뜩이나 검은 얼굴이, 더욱 흉해보인다.
뚫릴 듯 뚫릴 듯 뚫어지지 않는다.
다시, 책상 앞으로 시선이 간다.
그 곳에, 앙상하게 종이만 남은 문법책 위로 오늘 날짜가 적힌 액자 하나가 놓여 있다.
액자 안의 환한 미소가 날 액자 안으로 끌어들인다.
특별하진 않았다.
단지, 어느 샌가, 언제부턴가. 내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을 뿐.
항상 그녀는 나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평소에 내가 잘 웃지 않는다고, 마치 뭐 마려운 사람 같다고.
항상 내 얼굴을 보면서 먼저 웃어보이곤 했다.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다.
내가 가지지 못했었던 환한 그 웃음을.
영원히. 곁에서.
그. 러... 나.....
“멧되지 와따~!”
난데없는 도시 한복판의 야생동물의 습격에, 난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든다. 제기. 이 멧돼지 녀석이 내 눈가에 오줌을 갈겼나보다. 눈가가 축축해져버렸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한다.
‘♡아들!매끼밥은
꼭먹고공부해야혀
그래야힘들얻어뜻
을이루지화이팅^^‘
피식.
왠지. 오랜만에 웃음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문자를 잘 사용하셨지. 괜스레 죄송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인다.
조금 늦었지만, 밥이라도 먹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뼈만 남은 문법책을 탁 소리나게 덮었다.
우산을 챙기고, 현관을 막 나서려는 찰나.
쏴아. 쏴아.
어느새 수많은 검뎅이들이, 갓 태어난 물방울들의 성년식을 치러주고 있었다.
문득, 시원하게 비를 맞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우산을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가 맞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어디에선가 등장한 시커먼 먹구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슴 속의 숙변을 가득 분출하기 시작한다.
길을 달리는 나에게, 그리고 그 앞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밝은 햇살 하나가 어둠의 숲을 가르고 내 앞을 비춰주기 시작한다.
점점 커지는 빛의 틈 사이로, 나는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비를 맞으면서.
왠지, 이젠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다.
한단설, 2009/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