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특별한 취미나 재능이 없던 나는 책 읽는 일과 생각을 적는 글쓰기를 즐겨했다. 읽어 들인 것에 내 의견을 덧씌워 밖으로 표출하고 싶었다. N 블로그와 티스토리라는 곳에 신변잡기의 글을 가끔 올렸다. 두 블로그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글을 올릴 수 있는 비교적 진입이 자유로운 SNS였다. 반면 노출은 잘되지 않았다. 금기사항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읽는 이의 공감을 받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여기에 다양한 SNS 존재도 한몫했을 것이다. SNS에서 나의 글이 관심받지 못하자 글쓰기에 흥미를 잃게 되고 올리는 빈도 또한 현격히 줄었다. 현재 두 블로그는 목숨만 유지한 채 방치되어 있다. 이런 블로그를 가끔 들여다보면 마음 한쪽 구석이 짠하다. 타닥거리는 자판기 소리가 듣고 싶기도 하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글을 만났다. 출처를 살펴보니 브런치스토리라는 SNS였다. 이곳은 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함께 노니는 글쓰기의 큰 마당 같은 곳이었다. 진입에 요건은 있었지만, 진입이 허락된 후에는 어떤 글이라도 올릴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마땅찮은 글쓰기 공간에 목말라 있던 나에게 구미 당기는 SNS였다.
어떤 절차로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릴 수 있는지 관련 홈피와 검색창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소개 글과 자신이 썼던 몇 편의 글로 신청하면 심사 후 요건에 맞는 경우 글 쓸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다. 먼저 브런치스토리에 진입한 선배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다양한 진입 비법들이 눈에 띄었다. 비법이 있다는 것은 요건 통과가 쉽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퇴직한 백수로 「명리학」, 「불교」, 「부동산」, 「삶과 죽음」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소개했다. 심사받을 세 편의 글은 명리학, 삶과 죽음, 신변잡기에 관한 글이었다. 누구를 제쳐야 고지를 점하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인 만큼 요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합격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한 것에 상응이라도 했는지 낙방도 아주 가벼웠다(21. 1. 29. 첫 번째 실패).
작가 신청을 하면서 누구나 비슷했겠지만 나도 혼신을 다하여 신청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낙방에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1년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메일 목록을 보다가 처음 낙방 소식을 알려준 메일이 눈에 띄었다. 불현듯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을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 신청했던 내용에서 자구 수정을 하는 정도로 가볍게 다시 신청하였다. 이때도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합격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밀림의 왕자 사자는 연약한 토끼 한 미리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이런 사자의 신중한 행동은 오만한 인간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크다. 안일한 마음으로 신청하였음에도 합격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사필귀정.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한 것이라고 나를 세뇌하면서 낙방 시에 상심치 않으려는 꼼수를 부렸다. 다시 선택받지 못해 서운했다(22.3.18. 두 번째 실패).
두 번째 낙방 후 바로 재신청하려다 다른 일로 인하여 약 3개월 후 세 번째 브런치스토리 작가 사냥에 나섰다. 이때에도 기존 신청했던 내용을 크게 바꾸지 않고 조금 손 보는 정도로 다듬어 신청하였다. 이번에는 합격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왔다. 삼세번을 상기하며 합격을 기원했다. 신청 후 메일을 수시로 확인했다. 조바심의 발로였으리라. 며칠 후 내 눈에 들어온 메일 제목은 또 다시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22.6.24.세 번째 실패).
가볍게 신청한 것을 애써 강조하며 실패 때 충격을 완화해 보려는 얄팍한 마음을 다독였지만 감정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세 번의 도전에도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면 나의 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모하게 내 주장만 고집한 것이다. 내 인생 자체가 순조롭지 못한 것을 백번 받아들이더라도 글쓰기 마당에 진입하는 일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자괴감은 도전 욕구에 불을 지피기보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가닥 잡게 했다. 브런치스토리와 글쓰기를 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방향을 전환했다 쓰는 일 보다 읽는 일에 주력하기로. 자판기 소리가 그리울 때도 가끔 있었지만 순간이었다. 좋은 글을 다독함으로써 내공을 다지다 보면 쓸 기회는 분명 올 것이라 여겼다. 그땐 브런치스토리도 손짓하지 싶었다. 글 쓰는 일과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에 도전하는 일은 그렇게 나와 멀어졌다.
영원히 잊을 줄 알았던 브런치스토리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나를 자극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유행가가 떠올랐다. 브런치스토리가 뭐라고 이토록 집착하는지. 여러 번 실패의 경험도 잊은 채 기어코 네 번째 도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문맥의 흐름이 맞는지, 오탈자가 있는지, 비제도권 학문의 글이라 심사팀의 동의를 구하는데 의아하게 생각할 내용은 없는지를 살펴서 신청하였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리는 글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질 주제가 중요할 것이다. 이와 달리 나의 관심 분야인 명리학, 불교,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은 소수 특정 분야 사람들만 관심 가지는 분야다. 연거푸 합격하지 못한 원인이 주제가 합당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분야는 알지 못한다. 물론 내가 고수하려는 주제도 잘 알지 못하지만, 나에겐 흥미로운 분야다. 결국 주제는 바꾸지 않았다. 네 번째 신청은 마치 어렵고 경쟁률 높은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신청 내용에 심사숙고한 만큼 결과도 그에 상응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브런치스토리는 또 다시 나를 외면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했습니다 로 시작하는 메일 제목이 나를 매우 슬프게 했다. 마치 나의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듯했다(23. 8. 22. 네 번째 실패). 브런치스토리는 나와 무슨 원수라도 진 것일까.
오기 발동으로 지금까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진 것과 달리 불합격 메일 수신 이틀 후 정말 이번만은 진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다시 신청하였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글쓰기와 브런치스토리는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나에게 강한 주문을 걸었다. 미련 없이 잊으리라. 사랑 노래 가사 같이 정말 그러려 했다. 초반의 경솔했던 행동을 반성하면서 이번에는 애를 한층 썼다. 이런 각오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을 기회를 이번에도 얻지 못했다(23. 8. 24 다섯 번째 실패).
이런 처참한 도전 결과는 나의 글쓰기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신의 우회적인 계시로 들렸다. 더 이상 자판기 두드리는 노력과 생각을 낭비하지 말라는 계시였다. 책을 열심히 읽고 수양을 더 하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글 쓰는 일이 두려웠다. 전문 작가도 아니고 글을 쓰는 일로 밥벌이하는 사람도 아닌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고 당장 나의 신변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글 쓰는 일을 놓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펜을 들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니 이제는 글 쓰는 일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습관의 무서움이었다.
그런데 10월 10일경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고 보잘것없는 독자 입장이지만 내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기분이었다.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다. 위대한 한국인의 피를 가진 내가 브런치스토리 작가 도전에 몇 번 실패했다고 글쓰기와 브런치 작가 되기를 포기하다니. 사실 많은 실패를 하긴했다. 그렇지만 끈기의 한민족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소한 일상에 관한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용솟음쳤다. 브런치스토리에 구애하고 싶은 마음도 다시 생겼다. 그러나 선뜻 나서지는 못하였다. 이번에는 모시지 못했습니다 라는 메일을 받는 것이 저승사자님을 보는 듯해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고 있던 차 그 때라는 것이 어느 날 문득 찾아왔다. 한강 작가님의 기쁜 소식에 이어, 옛 직장 동료가 『버스타고 산티아고』라는 여행 에세이를 출판했다는 소식이었다. 직장을 퇴직한 이들은 대게 삼삼오오 모여 등산, 골프, 술자리에서 화려했던 과거만을 먹고사는 편이다. 이에 반해 옛 동료 신우선 작가님은 『버스타고 산티아고』라는 여행 에세이 출판을 계기로 자신의 후반 인생을 화려하게 시작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여행이지만 아무나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값진 일이 아닌가 싶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글쓰기 불꽃이 일어났다. 브런치스토리 몇 번 실패했다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다니 참 못난 행동이다. 한강 작가님과 신우선 작가님 덕에 다시 한번 자판기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 보기로 했다. 역시 두드리니 문은 열렸다.
여섯 번째 신청에는 내용에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처음 제시했던 주제를 고수하기로 했다. 다만 심사팀에게 비제도권 학문이나 종교적인 문제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명리학은 비제도권 학문이지만 몇천 년을 이어 온 점에서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불교는 다른 종교 교리와 상충하지만, 모든 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행복과 선 추구에 있는 점을 강조하였고, 부동산은 여전히 우리 사회 가장 큰 이슈인 점을 고려하여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상이고,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만큼 결코 떨쳐 버리고 갈 수 없는 주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시절 인연이 없다면 재능이나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여섯 번째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은 한강 작가님과 신우선 작가님의 영적인 영험 덕택인지, 여섯 번의 구애에 브런치스토리가 불쌍히 여겼던 것인지.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메일을 받게 되었다(24. 11. 13 합격). 가벼운 시험도 합격하면 하회탈 얼굴로 변한다. 하물며 6수 끝에 브런치스토리 작가에 합격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었겠나. 누가 등 떠밀어 시작한 일이 아닌 좋아서 시작한 일이기에 합격의 기쁨은 컸다. 잔치라도 벌여야 했었나!
결국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닌 포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다. 혹시 어떤 분야에서 다수의 실패로 포기하거나 낙담하신 분이 계신다면 저의 경우를 생각하고 다시 한번 심기일전했으면 한다.
어렵게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된 만큼 내 삶의 소소한 흔적과 관심 분야에 관한 생각을 다듬어 올려 볼 참이다. 명리학, 불교, 부동산, 삶과 죽음, 신변잡기는 나의 삶에 영원한 질문이자 주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