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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藝術)] 태평무(太平舞)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의 미감

by 동그라미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태평무>


1929년,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시가 실려있다. 여기에서 <태평무>를 춤춘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경무대(景武臺)를 지나며... / 이은상

제무문(祭武門) 헐린터에 돌몃덩이 남앗고야
버린 돌알에 새풀은 무삼일고
노구(老嫗)는 광우리들고 산채(山菜)캐러 오더라
귀하신 중궁(中宮)마마 네문속을 드나실제
네엇개 놉흐냥해 북악(北岳)을 깔보돗다
그 영화 누를다주고 참아어이 헐린고
가버린 녯날이야 다시오든 못하리라
버들만 가지늘여 봄바람에 흔들고야
무음일 저것호을로 태평무를 추나니


동아일보 1929년 5월 2일


<태평무>의 의미는 누구나 연상할 수 있듯이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춤’이다. 당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성준의 <태평무>가 발표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시에 실린 <태평무>는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시어로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태평성대를 향한 마음’을 <태평무>라는 춤으로 역사 속에 녹이고자 했던 것 같다. 한성준의 춤 작품 <태평무>에서도 그 의미는 동일하다. 1938년 6월 19일 조선일보에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소속 춤꾼들이 고전무용대회에 참여한 기사를 보면, <태평무>를 “태평성세에 질탕한 음악에 맞추어 흥겨운 춤을 추어 일월성신과 더불어 평화를 노래하는 것입니다.”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성준의 <태평무>의 흐름은 나라의 태평과 평안을 빌면서 시작하여 신을 맞이하고, 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성준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 조국에 대한 애착을 담아 <태평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한성준의 제자 강선영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서 공연하였으며 관직 종구품(從九品)에 해당하는 참봉(參奉)이라는 직위도 받을 만큼 애국자였다고 한다. 이처럼 <태평무>는 나라의 평안과 태평을 기원하는 춤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태평무>의 뿌리와 유파

<태평무>의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고 의견이 분분하다. 궁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민속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재인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무당이 추던 춤이라는 설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고려시대에 팔관회 또는 중국에서 들어온 역귀를 쫒는 구나의식인 나례(儺禮)에 <태평무>를 추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태평무>가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는 역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존하는 <태평무>는 한성준이 흩어져있던 춤을 집대성하여 재창작한 것이다. 1935년 한성준 조선무용연구소의 신작 발표회에서 그의 정신이 담긴 <태평무>가 무대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한성준은 1939년 조선일보에서 <태평무>를 창작한 배경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왕꺼리>라는 것은 왕을 위해서 추는 춤이라지만 사실은 옛날 조선의 임금이 추시엇다고 해서 생긴 옛날 춤입니다. 물론 오늘의 무당등속가치 그러케 뛰면서야 추시엇겟습니까. 아마 조흔 음률에 취하시어 점잔흐시게 팔이라도 가만히 처드신것이겟지오. 이 춤이 오늘에와서 변하고 변해서 소위 무당이 전해내려오는 <왕꺼리>가 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태평춤(太平舞)이라하여서 제자들에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성준은 소위 ‘조선의 왕이 춘 춤’이 궁중에서 왕을 위한 춤으로 바뀌어 무당들이 <왕꺼리>라는 이름으로 추었던 춤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작한 것이다. 춤의 틀도 고치고, 장단도 찾아냈으며 형식도 전통적으로 바꾸었다. 실제로 정종, 태종, 세종과 연산군 등 조선의 왕들이 춤을 추었던 것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한성준의 견해는 신빙성이 있다. 또한 <태평무>의 복식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왕의 앞에서 손을 보이지 않고 예를 갖추기 위한 의미의 ‘한삼’을 착용한 것이다. 정리해보면 궁중에서 왕이, 왕을 위해 추던 춤을 무당이 <왕꺼리>로 추게 되었고, 이를 한성준이 예술정신을 담아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평무>에서의 한성준의 예술성은 첫째, 음악에서 알 수 있다. <태평무>는 경기도 무속장단을 사용하였는데, 무당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수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외조부의 영향으로 예술에 입문하였고, 줄타기와 춤과 장단 등 두루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한성준은 충남에서 태어나 전국 각지를 돌며 유랑하며 경험을 쌓았다가 서울에 정착했는데, 이러한 예술적 기반으로 말미암아 수준 높은 장단을 짜임새 있게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춤에 뚜렷한 특성이 엿보인다. 한성준은 궁중무나 민속무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 정리하였기에 다양한 매력을 갖춘 <태평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한성준의 태평무에 대한 애착은 유독 강했다. 그는 1941년 7월, 68세에 영면할 때, 유언으로 수의(壽衣) 대신 생전에 입었던 태평무 의복을 입혀달라고 했을 만큼 말이다.

한성준은 <태평무>를 여러 유파로 파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손녀인 한영숙에게도 사사하여 한영숙류 <태평무>가 되었고, 제자 강선영으로 이어진 강선영류 <태평무>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재인청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진 이동안류 <태평무>도 있는데, 재인청에 재인과 광대뿐만 아니라 무부(巫夫)도 속해 있었다는 점과 이동안이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춤 선생으로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뿌리는 같지 않을까. 이밖에도 경기도 도당굿의 재인이자 무속음악의 대가였던 이용우가 춘 <태평무>도 있다. 복식이나 음악에 차이는 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모두 같다고 하겠다.



미감의 춤, <태평무>

1988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태평무>는 왕 또는 왕비의 복식을 입고 추며 격식이 있고, 우아하면서도 흥겨움을 자아내는 춤사위를 갖고 있다. 한성준이 처음 선보인 1935년 공연의 <태평무>는 2 인무였다. 한영숙은 왕을 역할이었고, 강선영은 왕비의 역할이었다. 한 때,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한복에 신라시대의 관을 쓰고 춤추었지만, 본래 궁중 복색을 하고 추는 춤이다. 이후에 강선영류와 한영숙류로 나뉘게 되면서 <태평무>는 독무로 추게 되었다. 오늘날 <태평무>는 군무로도 추는데, 무대 위에서 그 고귀함은 더욱 웅장하다. 또한 과거보다 경쾌하고 흥겨운 면이 강해졌으며 화려해졌는데,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추측하건대, 과거 우아함이 강조된 궁중무의 춤사위가 무당에 의해 무속적 성격이 가미되었고, 한성준에 의해 무대로 올라가게 되면서 극장에 맞게 변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정신과 다양한 계층적 특성 및 시대성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태평무>는 춤사위 중 발디딤이 매우 인상적이고, 발짓과 함께 휘젓는 팔사위의 곡선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이러한 곡선의 미와 동시에 꼽을 수 있는 <태평무> 춤사위의 아름다움은 정중동(靜中動)의 미가 있다. 장단의 흐름에 따라 사이의 공간을 내적 움직임으로 채운다. 움직임 속에 절제된, 그리고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태평무>의 춤사위는 장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정확한 표현력을 표출하기 어렵다. 진쇠, 낙궁, 터벌림, 섭채, 올림채, 도살풀이, 자진도살풀이 등의 다난(多難)한 장단 속에서 흐트러짐이 없는 단아함과 기품을 느낄 수 있다.

<태평무>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는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태평성대의 의미, 그리고 미감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태평성대를 바라고, 원한다. 새해엔 한국의 대표적인 춤인 <태평무>를 통해 풍요로운 한 해를 보낼 수 있길 바란다.


조선일보 1939년 11월 8일


* 이 글은 충남서산문화원 월간지에 기고한 바 있음.


(출처)

* 「경무대(景武臺)를 지나며...」, [동아일보], 1929년 5월 2일 3면.

* 「고전무용대회」, [조선일보], 1938년 6월 19일 4면.

* “목은시대(牧隱時代)의 나례(儺禮)는 순중국식(純中國式)에서 다소(多少)떠나서 화관(花冠)을 쓴 처용무도 잇고 태평무(太平舞)도 잇서서 가무백희(歌舞百戱)에 갓가워졋다. 이것이 산대극(山臺劇)이 발생(發生)할 전조(前兆)는 아닌가?” 「조선춤이야기: 조선연극사(朝鮮演劇史) 삼국이전으로부터 현대까지 8」, [동아일보], 1931년 4월 23일 4면.

* 조선음악무용연구회(朝鮮音樂舞踊硏究會)는 1934년 한성준 조선무용연구소(朝鮮舞踊硏究所)로 간판을 갈아 붙였고, 전적으로 무용만을 가르치는 기관으로 발전되었다. …조선무용연구소가 되어 전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게 되자, 이듬해인 1935년에 부민관(府民舘)에서 신작발표회(新作發表會)를 가졌다. 이 때 공개된 작품은 승무(僧舞), 학무(鶴舞), 태평무(太平舞), 신선무(神仙舞), 살푸리춤, 한량무(閑良舞), 검무(劍舞), 발나무(鉢羅舞), 사공무(沙工舞), 농악무(農樂舞) 등이었다.” 「풍유명인야화(風流名人夜話) 94」. [동아일보], 1959년 9월 4일 4면.

* 「고전예술의 일대정화(一大精華) -세계에 자랑할 우리춤」, [조선일보], 1939년 11월 8일 4면.

* “무당의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장단이나 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 원각사(圓覺社)에 나가게 되자, 지난날의 궁기(宮妓)들이 추는 궁중무용을 보고 이것을 정리 연구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성준의 신작이란 것은 대개가 민속무용이나 궁중무용을 자기대로의 방식으로 개작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풍유명인야화(風流名人夜話) 97」, [동아일보], 1959년 9월 8일 4면. 다른 기록에는 한성준이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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