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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藝術)] 최승희(崔承喜)와 매란방(梅蘭芳)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근대 예술인의 교류와 우정

by 동그라미


최승희(崔承喜)와 매란방(梅蘭芳)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1992년도에 시작되어 벌써 20년이 넘어 3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고, 경제적 성과를 꾀하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비공식적으로 예술가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중국은 밀접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서로 역사의 기록에 일부분을 차지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과거, 조선시대 이전부터 사행길을 다녀온 사절단이 존재했으며, 머지않은 근대시대에도 예술가의 교류가 빈번하였다.(사실 초기의 벽화를 통한 제사의식에서도 교류의 단서는 많이 발견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예술가 간의 교류를 볼 수 있는 대표적 인물로는 최승희와 매란방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근대시대에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당대의 유명인들로 언젠가 만나게 될 인연이었던 것처럼,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가족들이 예술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 선천적으로 예술적 성향을 띠고 태어난 점이다. 둘째로는 현대적이고, 새로움을 가미한 창작의 성향을 추구했던 근대시대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최승희는 작가이자 연극인이었던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남편은 문학평론가였다. 그녀는 한국의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녀는 지금의 한류스타처럼 국내·외를 다니며 많은 인사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영감과 자극을 받았다. 이는 곧 작품에 피드백으로 작용하여 꾸준한 발전의 발판이 되었다.


특히 최승희는 동양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 동아시아권에서 그녀의 예술의 모티브를 얻었다. 일본은 어릴 때부터 밀접한 곳이기 때문에 작품에 자연스레 색채를 띠는 경향이 있었다. 스승도 일본인인 이시이바쿠(석정막)이며, 일본에서 문하생을 거쳤던 점도 한몫을 한다. 때문에 가깝지만 자주 접하지 못했던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하여 항상 방문하기를 원했다.


매란방은 조부와 부친이 명배우로 활동하였고, 그 끼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는 경극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양한 해외 활동을 다니다가 홍콩으로 넘어가서 잠시 활동을 중단한 바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출중한 소질이 있어 다재다능한 면이 많았다.


처음 이들의 인연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승희의 세계일주 무용공연을 지원해주기로 한 계약자인 미국인 바킨스는 이전에 매란방을 초빙하여 공연한 바가 있던 인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 해외 공연을 다닐 때 익히 서로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어 서로가 뛰어난 예술가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2년 중국 북경에 위문공연을 하러 방문하게 된다. 당시 최승희는 단원들과 함께 방문했으며, 이 공연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성황을 이루었다. 공연 후 중국 경극의 명류들은 최승희와 단원들을 위해 환영 만찬회를 마련하였다. 근데 아쉽게도 당시 매란방은 부재(不在)였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그와의 첫 만남은 무산되어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때 중국적 색체의 초기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최승희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석굴암의 벽조>가 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윈강 석굴(云冈石窟)의 석불을 보고 창작한 것이다. 또, 최승희는 오리엔탈리즘의 지향으로 인한 동양적 무용의 창조를 위해 중국의 경극과 곤극에 관심이 있어 중국 방문 당시 직접 공연을 보러 다녔다. 이때, 중국의 무용이라는 것이 하나의 독립된 예술이 아닌 연극이나 음악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당시 최승희는 극의 일부로 포함되는 무용을 보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의 무용은 한국의 신무용과 같은 독립된 개체의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중국적 소재들을 응용한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중국의 인물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중국 송나라 왕소군이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어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가는 슬픈 이야기를 무용화한 <명비곡(明妃曲)>, 당나라의 양귀비를 소재로 한 <양귀비염지도(楊貴妃艶之圖)>, 용비(容妃)라고도 하는 건륭제의 여자인 비련의 여주인공 <향비(香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일본으로 공연을 하러 갔지만, 당시 전쟁으로 어려움이 있어 일본에서 탈출하여 중국으로 넘어가 1943년에 상하이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당시 최승희의 공연에 대한 기사를 보면 노래가 중심이었던 종래의 경극이 최승희의 중국 무용에 자극을 받아 춤이 중시되는 경극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무용에 영향을 줄 최승희에 대한 예견과도 같았다. 그것은 드디어 최승희와 매란방이 만나게 되면서 현실화가 되는 듯했다. 마침 매란방이 상하이로 돌아왔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자주 만나며 서로의 창작활동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 하여금 서로 예술의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고, 매란방은 최승희에게 본인의 그림을 선물할 정도로 마음이 잘 맞는 예술 동지가 되었다.


네이버 카페: 최승희조선민족무용기본보존회


최승희는 1944년에 북해공원 부근인 북경시에 집을 마련하고 <동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면서 중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북경 정부 밑에서 무대에 서는 것을 꺼려하고, 은퇴하고 있던 매란방에게 춤을 배웠다. 1945년 연구소를 더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며 둘의 조우는 더욱 깊어졌다. 매란방은 중국 무용의 독립이 어렵겠지만 가능한 일이라며 최승희를 독려해주었고, 최승희도 전통의 발전이 곧 새로운 창조와도 같다는 사상으로 동방 예술에 힘썼다. 따라서 최승희는 중국 무용의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중국 무용의 기본 동작 모색과 창작론을 재정립하는 큰 역할을 한다. 이는 중국인도 해내기 어려운 중국무용의 역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일이었다. 이렇듯 최승희에게 매란방과의 만남은 그녀의 열정을 가속화시키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탄생한 최승희의 중국 작품은 다작인 편으로, 전설 또는 설화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 많다. 항아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받아 남편을 주지 않고 두 개 다 본인이 먹어 두꺼비로 변했다는 중국의 전설이야기 <월궁행(月宮行)>, 불교에서 귀자모신의 딸로서 중생에게 복덕을 주는 부처인 <길상천녀(吉祥天女)>, 중국의 유명한 명소인 자금성의 옥으로 만든 불상에 대한 <자금성(紫禁城)의 옥불> 등을 탄생시켰다. 또한 중국의 유명 경극 작품 중 초한(楚漢)의 전쟁 때 항우와 우미인과의 이별을 그린 작품인 <패왕별희>의 경우 창작은 아니지만 최승희가 안무한 바 있다.


최승희는 꾸준히 중국무용의 체계를 정리하는데 힘쓰곤 했는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다시 중국으로 피난을 가서 1951-2년까지 있는 동안 더 심도 있는 중국의 무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독자적인 중국의 무용의 양식이 확립되고, 이를 토대로 최승희는 또 다른 창작물을 재탄생시킨 것이다. 더 나아가 매란방의 부탁으로 경극의 동작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한국무용가로서 경극을 지도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동아일보 1998년 7월 6일


최승희가 본인의 업적만을 위하여 매란방을 만나고, 중국무용에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국가적 관계나 정치적인 성향은 더더욱 아니다. 그녀가 중국의 무용에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최승희의 개인적 무용 기법은 물론 창작 작품의 다양화를 실현할 수 있었고, 매란방과의 중국 무용 메서드 개발은 경극 속의 무용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과거보다 많은 것들이 발달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국가 간에 자국의 문화만을 지키려고만 한다. 예술의 협업이 서로의 발전과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것임을 이미 과거를 통해 배웠는데 말이다.


* 이 글은 국악 잡지 라라에 기고한 바 있음.



(출처)

* [조선일보], 1937년 10월 26일 참고.

* 최승희, [부인공론(婦人公論)[, 1942년 10월호 참고.

* 다카시마 유사부로, [최승희(崔承喜)[, むくげ舍, 東京, 1981.

*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중국조선문화사 대계3-예술사], 중국민족출판사, 267-9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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