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사랑하지 않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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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김필성’군이 여섯 살일지, 다섯 살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김필성’이 입니다. 내가 ‘김필성’이란 존재를 모를 때, ‘김필성’군은 자신이 콧물을 흘리며 작업한 플라스틱 접책(摺冊)이 길 한복판에 나뒹굴고, 그것이 내 눈에 띄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차곡차곡해야 할 작업을 해왔겠지요.


색종이로 대강 접은 저고리, 검은 연필 때가 묻은 책받침, 어설프게 그린 색깔 없는 코스모스 그림과 한글 자모가 엉성하게 쓰인 종이 등. 그 자신에게는 자랑스러운 흔적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리 보도블록 위에서는 그의 자랑스러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겨울 해가 좋은 어느 날, 그렇게 그와 나는 서로 모르는 타인으로 남았습니다. ‘김필성’군이 나를 전혀 알지 못하고 내가 그를 좀 더 안다는 정도로 말이지요. 인연이 그 정도인 게지요. 나는‘김필성’군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이 흘린 접책을 찾으려는 그를 봤다면 그 위치 정도는 알려줬겠지요.)


그렇게 지나가는 인연을 봅니다. 만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압니다. 만난 사람 가운데 사랑한 사람보다는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들이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다 사랑하지는 않아.>


고백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거꾸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도 즐겁습니다. 미운 사람을 미워하는 재미도 있는 것이지요. 누구든 사랑하거나, 누구에게서든 사랑받으려 하는 것은 창부, 혹은 창남(娼男)처럼 직업적인 기술을 구사할 때에나 용인될 것입니다.


그 직업을 가진 분들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따지는 것은 부당할 것입니다. 그것이 일이기 때문이니까요.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게 된다는 것에서 갖춰질 겁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지 않아.>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내가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릴 테니 말이지요. 모두를 사랑하지는 않게 되는 것에서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다는 건 우습지요. 하지만, <너와 나>의 시작은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사랑하게 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의미가 과연 있겠나요. 나만의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지요.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고 자신을 윽박지를 필요는 없겠지요. 가끔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 앞에서, 자신을 편협하다고 착각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을 봅니다. 인간은 그렇게 모두를 사랑하게 생겨 먹지를 않았습니다. '자기'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면, 미움도 즐길 수밖에 없다 싶습니다. 미울 땐 미워하고, 사랑스러울 때 사랑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미움과 사랑의 대차대조표의 합이 영(零)이 되는 날이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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