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는 원래 쓴 맛

이름 불러주기

by 어뉘


카카오는 원래 쓴 맛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은, 이 글에 넣을 만한 것만 차용해 말하면, 두 발로 걸으며 도구를 사용하고, 머리를 얍삽하게 굴릴 줄 아는 개체를 '인간'이라고 해도 그 인간이란 단어가 인간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인 듯싶다. 아름답다는 말이 아름다움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행복마을’에서 행복을 찾는 건 인지상정이라 해도, 불행이 거기 끼어있다고 울 일은 아닌 게 된다.


한편, '인간'이나,‘돌' 등 각각의 개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속성으로 그 ‘실체’를 인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재론(Realism)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여기에서 ‘~다움’이나‘~답지 않다’는 사고가 파생될 수 있을 듯하다.

이름이 단순히 이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실체를 그려내거나,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필명, 데스티니가 <나는 '아무개'의 누드사진을 보고 싶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자 데스티니답지 않다고 핀잔하는 댓글이 달렸기 때문이다. 댓글을 쓴 분이 평소 데스티니에게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었나 싶지만, 데스티니 다움이란 데스티니에게 무엇인가, 왜 데스티니는 데스티니다워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 까닭이다.


우리가 데스티니(Destiny) 님을 알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나? 우리는 필명의 뜻을 생각하며 그를 부르고 있지는 않다. 그를 안다고 할 정도의 단서는 거의 없고, 그것으로 그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로 그를 알 뿐이다.


그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게 있다면, 그를 지칭할 필요가 있을 때 그 필명으로 불러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그가 여성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그가 썼던 글과 게시한 사진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런 그가 대중의 눈길을 끌려는 각종 미디어에서 가십거리로 소모되고 있는 '아무개'라는 동성인 여성의 누드사진을 보고 싶다고 쓰자 데스티니답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데스티니답다는 것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데스티니가 여성이고, 그가 동성 여성의 누드사진을 보고 싶다고 쓴 것을 가볍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태도를 유지해야 했던 건가? 그리고 '왜 그런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댓글을 쓴 분만이 갖고 있는 데스티니에 대한 사적 애호의 틀 안에 있을 뿐이다. 데스티니답지 않다는 주장이 지극히 사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데스티니가 지금까지 포스팅한 글에서 풍기는 것과 그 글이 총체적 일맥을 이루지 않았나 보다.”

하고 지나치면 좋겠지만, 데스티니답지 않다는 댓글을 쓴 분의 말은 정작 이런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가슴속에 그려놓은 데스티니가 있는데, 나로서는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데스티니의 그 글을 읽으니 내가 바보가 된 것 같다. 욕을 먹은 기분이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려 놓은 인간이 되어 내가 생각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라는 주문에 가깝다. 생떼와 닮았는데, 재미있게도, 데스티니도 평소의 당당함을 꺾고 갑자기 원래 ‘데스티니다운 것’이 있었던 듯 수줍어하면서 움찔하는 모양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데스티니 자신도 '데스티니 다움’을 마음속 어딘가에 상정(常定)하고 있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우리는 상당히 구상적인 사고를 하면서, 자신을 추상적으로 바라볼 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데스티니 자신이 데스티니답지 않다고 말하는 그를 위해, 그가 만들어 놓은 데스티니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어야 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 그의 댓글은 데스티니에 대한 애정이 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분이 자신이 그리지 않은 데스티니에 놀라서 데스티니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진정한 애정이라면, 데스티니가 놀고 싶은 대로 놀게 하는 것이 더 깊은 애정의 표현이 아닐까.


어뉘가 쓰는 이름은 ‘어뉘’이다. 열심히 사랑 타령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만 잡아주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제 딴에는 귀여움을 다 떨어대는 남성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이 겪은 경험의 틀에 맞추어 어뉘를 그려놓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어뉘가 한 행동이나, 올린 글에 어뉘답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가 생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라고 하는 표현도 그렇다. 나이는 인간의 세월을 형식화한 기호이다. 우리는 우리 의식의 저 안쪽에 우리를 분석하기 위한, 나이에 관한 독특한 고려의 틀을 마련해두고 있다.)


데스티니를 두고 데스티니다운 것을 찾는 건 그것을 찾는 이의 이기심이다. 데스티니에게 데스티니다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스티니이다. 갓 태어나 똥오줌 구별 못했던 때의 데스티니와 나이 들어 똥오줌 구별하는 데스티니는 같은 인간이다. 데스티니 외에 또 다른 데스티니는 존재하지 않고, 않을 것이다. 데스티니는 유일(唯一)이다. 누군가 데스티니를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생각한 데스티니가 아닌, 데스티니 그대로를 사랑해야 한다. 데스티니의 그것이 좋고, 데스티니의 저것이 싫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면 모든 사랑, 애정, 그리고 관심은 강요로 변질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대다. 정확하게 말하면, 타인이 보는 ‘나’다. 그것은 그대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다. 그대 다움을 찾는 일은 타인에게 맡겨둔다. 거울에 비친 그대에게서 그대 다움을 그대 자신이 찾는 건 피곤하다. 그대 자신이 ‘그대 다우려고’하는 것은 더욱 우습다. 그대가 살아낸 삶과 그대의 생각이 '그대답기 위한 것'일 수는 없잖은가.


카카오는 원래 쓴 맛이다. 어떻게 먹는가는 먹는 이의 취향이다.


가장 조심할 건 그대의 자의식이 그대 다움을 찾을 때다. 원래 없는 것을 찾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그대 다움을 잊으라는 말과 같은 말일 수도 있다. 그대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할 이유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대답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이들이, 당장은 아니어도, 그대를 '정말' 사랑할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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