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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Jul 31. 2019

사랑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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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전에




요즘,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은 산 자가 발행한 사망확인서(또는 진단서)로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아는 자가 죽었다고 확인을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 확인은 <내> 죽음을 확인하지 못합니다. 산 자 혹은 타자에 의해서 확인되는 남의 이야기인 겁니다. 남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죽이거나, 그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나>를 죽었다고 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애가 <나>를 죽입니다. 


자살이라는 것도 내가 본 주검의 상태로 나를 두는 것일 뿐, 죽음 여부는 내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역시 산 자만이 죽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타자로서만 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타자의 타자로서 죽습니다. 


사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사라집니다.


"얘는 죽었어." 사망진단서가 나온 뒤에야 비로소 <그>가 된 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로소 좋은 사람이었거나, 악당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분방을 앗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평가나 판단이 가능한 객체로 남습니다. 앙심을 품을 수도 없고, 호감을 가질 수도 없으며, 누구처럼 사람을 죽여 토막을 낼 수 없고, 화가 치밀어 골프채를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삶이 더 이상 어떤 선택으로 좌우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내> 삶이 아닌, 타자의 삶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에 대한 이야기, 즉 남의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는 아니지요.


우리는 그렇게, 죽음을 포함한 남의 이야기, 이를테면, 뉴스, 드라마, 영화, 소설, 시, 수필을 좋아하고, 나아가 험담도 좋아합니다. 모두 타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약점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이나 처지에 이입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확정적으로 남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자기애 덕분입니다. 남의 장례식에서 가장 애통해하는 이들이, 대개는 죽은 자에 대한 애석함이 아니라 산 자인 그 자신의 삶을 운다고 하는 것 역시 자기애의 표출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죽음'을 '사랑'으로 대체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나는 실현될 수 있는 불멸을 꿈꿉니다. 내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죽음은 잊히는 것이니까요. 자기애를 버릴 수 없고,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대에게, 그래서 묻는 겁니다. 


 "언제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지?" 


이 질문에 '그래, 보장할게'라고 다짐해주세요. 이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내가 사망진단서를 몸 어딘가에 매달았을 때 나를 쉽게 타자화하고, 서둘러 그대에게서 나를 지우고 말겠다고 벼르는 것과 다름없잖아요. 왜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속뜻까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해도, 그 요구가 내가 당신을 진정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인 것은 눈치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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