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버리기 좋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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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그를 버리기 좋은 때




떠나려는 그대를 잡기 위해 그가

"내가 잘할게"라고 애걸한 뒤에도

그에게 잘한다는 게 뭔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영리한 그대는 압니다


"잘할게"라고 하기 전의 사랑이

그가 할 수 있었던 사랑이고,

그게 전부라는 걸 아는 겁니다


본질적으로

그대가 바뀌지 않듯이

그도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소홀했다"는 것을 그가

알아챘다는 것 자체는 대단해도,

그와의 사랑에서 받을 수 있는

그의 배려는 이미

받아봤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경험이 사람을 키워주긴 하지만,

그가 가진 인간성은

잠시 감춰질 수 있어도

여전히 그 안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대가 여전히 그대이듯이 말이지요


그와 그대가 하는 사랑이 그랬던 겁니다

사랑에 영리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도 있는데,

노력은, '사랑하니까'로 합리화 하는 동안

보상을 기대하는 '거래'가 되고 맙니다





그대가 그를 버리는 것은

처음 사랑할 때의 풋풋한 그와는

아주 다른 사람을 버리는 겁니다

그대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니까요

그대의 말 한마디로 고상하게

지나가는 이별이 드문 까닭입니다


그는, 그대에게서

버림받는 것이 처음이고,
그때, 비로소 적나라한 그를

제대로 알게 될 겁니다


("그래, 그동안 고마웠다"며

흔쾌히 등을 돌린 그를 본다면,

그대의 사랑과 분별력

자랑해도 좋을 겁니다)


생존 본능 덕분에 우리는

사랑받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에 예민한데,

대개의 이별에서는 누군가

함부로 버려집니다

거칠 것 없는 자기 보호본능에

심각한 자극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별하기 좋은 때는

이별이 그에게 필요할 때일 겁니다




가장 좋은 이별은

그가 이별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대 역시

그와 이별하게 되는 이별입니다

누구든 상처를 입지 않도록 말이지요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로

사랑한 것이라는 것을

그가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지요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그를 '죽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걸 아는 그대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겁니다 언젠가

그를 버리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건 역설적이게도 그대 자신을

아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족할 줄 모르는

지구 상의 유일한 동물입니다

죽음을 아는 동물의 독특한

결함이라고도 봅니다만,

우리는 백을 맛보면. 오십도 아니고

아흔아홉의 맛에도

"영, 맛이 갔다"라고 합니다

마침내, 백을 당연시하는 겁니다


그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받던 그에게,

그에게 이별의 때와 왔다는 것은

쉽게 깨닫게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대가 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언제 그대를 버려야 할지

그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그가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을 받을 만큼

똑똑하지 않은 그를 사랑하는

그대의 자존감, 분별력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대의 자존감이 입꼬리에 걸쳤는지,

가슴 언저리에 있는지 살핍니다

전자일 게 분명하지만)


사랑한 사이에 대해 쓰고 있지만,

딱히 사랑한 사이일 건 없고,

그저 아는 이, 직장 동료, 또는 친구든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흔한 관계에는 마음을

모두 담은 사랑과 달리,

앙금이 남습니다

좀 오래된 노래, 'Kansas'가

읊은 것처럼 모든 것이

'Dust in the wind'가 될 텐데,

영원한 것이 없다면 그에게

무엇인가 남길 건 사랑일 겁니다


사랑하는 동안이 전부

행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랑 자체는 행복의 소재일 겁니다

그걸 그에게 남겨주는 겁니다


아주 영리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그를 버리고 싶을 때 버리기 위해,

사랑하는 동안은

그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그와 그대, 누구에게도

후회를 남기지 않게 되리라는 데는

그대도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사랑한 덕분에

그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부작용도 있겠는데,

그건 뭐, 그대의 숙명으로 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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