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의 유효기간
"날 사랑한다며?"
짜증을 섞어 윽박지르는
악당이 있습니다
그대가 그 말을 듣고 있다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게
뭐, 큰 약점을 잡기나 한 듯
같잖게 놀고 있는 이 악당에게
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거나
'사람이 변했다'는
비난을 피하고 싶은 거겠지요
그런데, 그 사랑의 유효기간이
그대가 사랑할 때까지 일 때,
사랑한다는 말의 유효기간은
그 말을 하거나 듣는 순간뿐으로,
시간이랄 것도 없습니다
"사랑해"
사랑도 마찬가지이듯 이 말엔,
과거가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당신도 그에게 고백을
해봤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제법 축약된 이 말을 풀어보면,
"너를 봐. 너를 너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의
너를 내가 사랑해, "
라는 말을 줄인 것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게
현재뿐인 겁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거기 있다고 우기는 건
개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사랑한다는 것엔 그대와
그대가 짊어진 삶이 들어있습니다
과거로부터 단절된 그대가 아니라
시간의 질곡에 따른 그대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겁니다
아니면, 선택적인 호감일 뿐
사랑이 아니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여하튼, 사랑은
그를 위한 밥상이 아니어서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거나,
누군가 먹여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떠먹게 둡니다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 그에게
먹는 방법까지 가르쳐야 한다면,
그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대개, 그를 사랑한다고 한 자신의
말에 얽매어 있기가 쉬운데, 그게
이미 사랑이 아니란 건 아시지요?
한편,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 "라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달래고 있는
그대 자신을 문득 볼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대가 악당인 겁니다
'사랑은 구속의 도구가 되거나,
조건이 되거나 빌미가 될 수 없다'라고
필요할 때마다 쓰고 있습니다만,
부지불식 간에 사랑을
조건으로 쓰게 되는 것은
사랑의 항상성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그런 척은 할 수 있어도
실제로 항상성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그대가
매일, 매 순간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보게 되는
그대 자신의 눈을
말릴 수가 없게 될 테니까요
분명, 어제도 본 그예요
그러나 사랑에 빠진 그대는
오늘의 그를 어제에 맡길 정도로
마음이 한가하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하는 게 취향이나
호기심이 아닌 사랑이라면
악당이 될 '짬'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한다며'라고 윽박지르는 악당을
가차 없이 버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대라는
'사람에 미치는' 사랑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이
사람에 미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인간에 관한 연구가
우리를 구석구석 분석해 놨지만,
인간이 여전히 사랑을 앓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일 겁니다
사람에 미칠 수 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게,
늘 우리에겐 아쉽지요
그러나 사랑에 미치겠다는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우리 자신인 건 틀림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 이외에
자신을 달리 드러낼 말이 없어서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습니다
"꼭 말로 해야 아나"라며
눙치는 이도 있는데,
그 자신의 코가 피노키오처럼 길게
자라지 않을까 두려운 겁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게 맞습니다
나머지는, 삶입니다
게다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 해야 할지
'자기 최면'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사랑한다는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대가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농담으로라도 사랑한다고 내뱉으면,
그는 '그저' 스쳐 보낼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라 해도
사랑이라는 말로 인해
그를 다시 한번 더 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의 일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는 까닭이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 방어기제 때문이듯이,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도 모르게
현대인이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사는
종족 보존의 아련한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서, 종족 보존 본능이라니까,
오직 성을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거기에는 부성과 모성에 따른
보육, 간호, 동정, 배려 등 다양한
강박감도 포함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그대라면,
사랑한다는 말밖에 없는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끊임없이 해야 하고, 그대가
듣고 싶을 때 들어야 하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 그렇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