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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Sep 09. 2020

매혹 5

매혹 5



그를 눈에 담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내 눈이 깊은 덕분인지

가득 차는 때가 없다

아마도 내가 담은

그의 얼굴이래야

표피에 불과해서 두께가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할 터다


"나는 싫어할 이유가 없어서

좋아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그는 눈을 반짝거렸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도,

이성적이며 이지적인 나를

무던하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에 대한 질투를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것 가운데

나도 가진 것은 목숨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다

그의 사랑스러움을 읽는 눈,

나는 그를 질투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거예요."

그는 그렇게 말했는데,

문득, 그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나의 질투를 감추려면

그의 개성을 미시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보는 게 아니라

그의 눈썹을, 콧등을, 아니면

왼손 새끼손가락의 둘째 마디를

본다든지 하는 거다


"'바퀴벌레 산책시키기,' 어때요?

내 취미로 생각 중이에요."

취미까지 질투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든 그와 내가

싸울 일은 없을 거라고

꽤 즐거운 얼굴을 했다

"근데, 난 바퀴벌레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나는 그를 위해 

바퀴벌레의 목에

목줄 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내 취미니까, 

고민은 내가 할 거예요."

그는 내게서 무엇을 본 걸까


흔히, 나를

'사람'으로 지칭하면

몰개성이 되어버린다

'나'라고 해야 개성이 보인다

'나'를 말할 때의 그만큼

사랑스러운 그는 없다

나는 그가 바퀴벌레를

제대로 본 적도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애인 산책시키기'로

취미를 바꾸게 하려면

고민하도록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확인하는 듯한

눈길을 내게 건넨다

"이번엔 뭘 읽었어요?"

그는 그 눈길에 그 자신이

나의 사랑받고 있다는

자부심을 담을 줄 알았다

내겐 그게 달콤했다


그는 '아무나'가 될 수 없다

누구든 그대를 보는 그를

아무나로 여기고 있다면, 그대는

자존감이 한참 낮거나

삶을 달관했거나,

그 둘 가운데 하나다


내가 그를 보거나 읽는 눈은,

대개는 그 자신이 그인 줄 몰랐던

그를 그려내곤 했다

그는 그런 나를 좋아했다


"절대, 너는 화가가 못 될 거예요."


그를 나처럼 그리는 이가

나밖에 없다는 건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 된다

독특함은 어떤 사랑에든

사랑을 위한 도구로 쓸 수 있다

물론, 그 독특함은

자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사랑에 빠진 그대의 열정이 만든다

개개의 사랑에는 그렇게 지문이 있다 

사랑에 중고가 없는 이유다


"너와 나만 알면 그만인

내 그림을 네가 그리는 데,

꼭 화가여야 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달다

방앗간에 날아들어간

참새처럼 나는 즐거웠다

그는 나를 즐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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