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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Oct 21. 2020

상냥함을 받으려면 젊음이 필요하다

생각편의점

상냥함을 받으려면 젊음이 필요하다




나는 열한 살 때 

다 컸다고 생각했고

스물일곱 살 때도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이에는, 거꾸로

'키가 더 크지 않을 뿐 

다 큰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조금은 겸연쩍으면서도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다


열한 살 아이도 때로 자신이 

다 컸다고 두 눈에 

힘줄 때가 있는 걸 보면,

젊음이란 것은

단순히 생로병사의 중간, 

그 어딘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삶의 일부로 쓰일 뿐

생리학 용어에도 젊음이 없다


한편, 생리학적인 설명은 가능하지만

마음이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늙지 않는 세월로는 젊음을 구분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말하는 젊음은,

하나의 정서(情緖)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젊음에 친절하다

젊음을 시샘하면서도

그 앞에 서면 관용을 보이는데,

아마도, 우리가 가진 본능이

자신의 삶을 보는 기준을

젊음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터다


삶 자체가, 탄생이나 죽음과는 거리가 먼

오늘의 젊음을 지나고 있으므로, 어쩌면,

젊음을 우대하는 건 자연스럽다


"삶의 연대기를 쓰며, 

열정은 삶의 뒤꼍에 던져놓고 

도대체 무엇을 사나?"

죽은 것과 뭐가 다르냐는

이런 힐난을 받을 정도면

삶이 한물간 게 분명하다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는,

우리가 젊음에게 다정해지는 이유가 

'젊음이 사랑스러워서'라는 시각에도

거부감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동안

상냥함을 받고 싶다면 젊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젊음에게 상냥하지 않거나, 

다정해지지 않는 자신을 

문득 자각하게 된다면,

생체 나이가 얼마이든

별 볼 일 없이 늙어가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에도 썼지만, 거리로 나선 나는,

"오늘, 누구를 사랑할까? "

이런 설렘을 즐긴다

문득 삶의 또 다른 것에 치여

때로 그러지 않는 나를 알아차리면,

내가 내 삶에 상냥하지 않은 거다, 

내게 미안해진 나는 

자신을 돌아보곤 한다


영리한 그대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리라 믿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좋은

젊음을 쓰는 방법을 모르겠다





사족:

아직 끝을 모르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는, 이 '젊음'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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