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뉘 Nov 05. 2020

내가, 뭐?

생각편의점


내가, 뭐?



내가 샘 오취리를

알게 된 것은

방송 화면을 통해서였다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것이 없었다


얼마 전 그는 그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확인해줬다

한국인이 흑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인지하고 있다고

말해 준 것이기도 했다


트럼프가 함부로 

유색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자신이 백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이젠

샘 오취리가 흑인이라는 것을 굳이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내가 그를 보는 데에

그저 인간일 수 있었던

샘 오취리를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더 피곤하게 된 게 분명하다



우리가 가진 야만의 기준이나

백인의 우월성에 대한 편견은

약탈로 부(富)를 일구던 백인들의

<대항해시대>*를 지나며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됐다고 본다


(그렇게 고착된 백인의 

우월성에 관한 시각이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희석된 것은, 그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에게 접근했든

자연의 한 수가 아닌가 싶다)

 

그들은 백인으로서의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인종을 보는 기준은

백인으로서의 '나'다


과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백인을 아무리 

부정적으로 평가해도

자기가 백인임을 주장하며

눈을 치켜뜨거나

분개하는 백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자신을 열등하게 보는

인간을 다루는 데에

불가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칼과 총을 쓰는 데에 주저가 없었고, 

지금도 그것들을 쓰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고 있다


약탈로 누리는 부유한 삶과 

문명화된 제도를 갖고 있지만,

타 인종에 비해 지저분하고

피부는 상대적으로 거친 한편, 

사고는 세련되어 보이지만,

기실, 기저에 있는 야만성을

아직 버리지 못한 게 백인이다


자존감의 손상은

자족(自足)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던 이들이

비로소 짓밟혔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아쉽게도, 손가락으로 두 눈을 

양 옆으로 찢는 모습에 

흥분하는 것은 그대가 

동양인이라는 자백일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그 몸짓에 대한 거부감은

역사학자의 책임도 없지 않지만,

발견의 시대라고 부르는

 <약탈의 시대>를 

정복당한 객체로 살면서

우리의 의식 저변에

자리 잡은 열등감의 일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헤게모니가

동양으로 옮겨지고 있다는데,

코로나-19 덕분에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만큼

자존감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사람으로 살아도 

불편한 게 많은 삶이다 

살갗을 가슴에 담은 채 

살 필요는 없을 터다 

태어나 보니 

어딘가에 속하는 게

우리가 가진 숙명이다

샘 오취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태어나 보니 흑인에 속했다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을 뿐 

편견에 따른 모욕을 그대로 가진 

인간 세계가 한심스럽지만, 

그렇게 생겨먹은 게 인류다

 

그러나, 다름은 

자연의 선택만큼 엄연하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 정도로

자존감이 뭉개지지는 않을 터다


오히려, 다름을

차이라고 말하는 인간들을 향해,

"짜아식들, 놀고 있네!"

여유를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차별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현실화될 경우를 제외하곤,

'그래서 뭐?'라고 맞장구를 쳐서

그들을 의기양양하게 할 건 없겠다


오취리가 어떤 활동을 하든

그의 삶이므로 뭐라 할 건 없지만,

사람이기 전에 흑인으로,

그냥 사람으로 대우해서는

더 이상 안 되게 된 것이 안타깝고,

한국을 잘 아는 흑인에서

한국말도 하는 흑인인 게

너무 분명해진 것이,

나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흑인인 걸 모르는 이가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수많은 나라의 사람을 겪었지만

나는 내가 황인인 것을 즐겼다

그들은 흑인이거나, 백인이었고,

황인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김어준 딴지총수와 김영대 문화평론가가 나눈 'BTS'와 '비긴 어게인'에 관한 대화를 듣고, 오취리가 생각났다.  



*대항해시대

역사가 강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대항해시대>라는 이 표현은 유럽인이 썼던 'Age of Discovery'라는 아전인수격인 표현을 동양인(일본인)이 번역한 것으로, 백인의 역사를 칭송함으로써 자신을 백인의 주변에 두려는 비굴함이 스며 있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을 더욱 잔인하게 다뤘던 것이 일제 부역자들이었던 것도 이것과 맥이 같지 않을까.)


그 시대는 황금을 찾아다니던 '약탈의 시대'였으며, 이전에는 없던 세계의 지배권이 백인에게 처음, '생긴' 때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아직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사족으로 덧붙이면, 동양인의 성격이 외부 발산적이고, 소유에 대한 강박을 가졌다면 세계는 동양에 지배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내부 수렴적인 사고와 대개 소유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덕분에 '내'가 우주라는 것에 만족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 방향을 알려주는 지남철_나침반과, 배에서 진행방향을 제어하는 '키'(Rudder, 舵)를 가장 먼저 사용했던 것은 동양의 중국인이었다. 유럽의 조선업자가 많은 인력으로 노를 사용하던 당시의 배에 이 방향키를 수용, 발전시켜 배의 고물에 장착함으로써 소수인원으로 대양을 항해할 정도의 선박 대형화를 가져왔고,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게다가 칼이나 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기의 기본인 총포의 혁신적 발전을 가져온 화약도 중국인이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냥함을 받으려면 젊음이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