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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Sep 02. 2020

편의점 청소 3

생각편의점

편의점 청소 3



교육 덕분에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거나, 이뤄야

자신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걸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좀 멀리 떨어져서

죽은 이들과

태어나는 이들을 보면

삶은 그저 내가 가진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기호에 맞게

소비하는 것만으로 

천부의 가치를 갖게 되는 듯 싶다


"누군가 나의 부모를 낳았고,

그들이 나를 낳았으며, 내가

또 아이를 낳았다. 이외에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해야만 할 일이 뭔가?*"


삶에는 의무가 없으므로

하지 않아도 누가 뭐랄 수 없는,

하게 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시간에 주눅 들지 않는

삶의 가장 좋은 도구는 사랑이다

쓰다가 버리거나,

구석에 처박아 두거나,

가슴에 품고 있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

아예 버린다면 모를까,

시간과 경합하지 않는

사랑은 낡지 않는

오직, 인간이 낡는다



누가 뭐래도 죽은 사람이

가장 슬프지 않을까?

그런데, 왜 산 사람이

우는 소리밖에 안 들리나,

사람 사는 세상엔.


죽은 사람을 두고

산 사람만 우는 게 정상이라면,

우리는 이미 승을

천국으로 인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웃어도 좋겠다



그가  죽고 싶어서

죽어가는 게 아닌 한,

죽는 그를 아쉬워하는 것은

그를 비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이에게

아쉬움을 보이는 것은

제법 야비한 일이 

"너는 확실히 죽어, "라는

확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침묵은 그런 때 쓴다

죽음에의 공포가

극심하다는 임종의 순간을

서둘러 끊어 주는 것이

진정한 애정의 표현일 수 있을 때,

죽어가는 이에게

더 살아달라고 기원하는 것은

전혀 사랑이 될 수 없다



주어진 시간의 길목마다

나름의 사정없는 삶이 없다 

우리에겐 그래서,

때로 위로가 필요하고

시쳇말로 '꼰대'가 필요하다 


흔히 아는 꼰대로서의

역할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꼰대를 팽할 기회조차 없는 삶이

너무 피곤할 터이기 때문이다


꼰대로 인해

그대의 현재를 수시로

인지하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두고

내 앞을 살아간 꼰대가

아무도 없어서

주어진 세상에 찌증을 내거나,

함부로 무시할 대상이 없는

'내 삶'은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할 텐가


꼰대를 삶의 양념으로

쓸 수 있는 지금이,

그대 삶의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싶다






*어느 중국 여인의 절규. _린위탕의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에서


다른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는데, 

나는 그가 몇 마디 말로

삶을 명료하게 읽었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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