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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May 19. 2021

사람이 사는 데

생각편의점

사람이 사는 데




연애와 달리 결혼은,

"우리 자신의 이성적인 결정이므로

도저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심사숙고한 뒤의

실패에 따른 낭패감을 피하려고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 결혼도 있고,

결혼을 시작할 때는 뭔가에 

눌린 느낌이었는데, 살아보니 

더 바랄 게 없다는 결혼도 있습니다


어떤 결혼이든 책임이 오롯이

자신일 수밖에 없는 탓인지, 

사랑하기 위해서 다투는 경우는 없고

이혼하지 않기 위해 다투거나

이혼하기 위해 다투는 걸 우리는 압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사랑을 위해 다투지 않는 것은, 비로소

우리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른은, 인간과의 알력으로는
 그가 좋으나 싫으냐만 있을 뿐

사랑과는 무관해진 사람입니다

당신이 사랑에 빠지는 건

아이의 순수를 가진 걸 겁니다

거꾸로, 그의 사랑스러움이 

함부로 살면서 죽여버린 

당신의 순수를 살릴 수도 있겠지요

한편, 사랑에 빠진 적이 없는 당신은

사람 맛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겁니다)



결혼한 두 사람이 눈을 반짝거리며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상대를 법으로 붙들어 놓고

하는 말로서는 어색합니다

입에 재갈 물려놓고 말 잘 듣는다고

말 자랑하는 마주(馬主)나,

'너를 사랑해'라지만 '어쩔 수 없다'며

목줄 채워놓은 애완견주와 같을까요

결혼할 정도로 사랑한다고 우길 수도 있겠는데

(사실은,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 생각은

추호도 없다"라고 해야 그나마 논리적일 겁니다), 

결혼이 사랑의 무덤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실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사전에는 결혼을

'남녀 사이의 결합'으로 정의하지만,

캠브리지 영영 사전의 'Marriage'는

'사람 사이의 결합'으로 정의합니다

(LGBTQ에 대한 인식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남녀'가 '사람'으로 바뀔 때가

우리에게도 오겠지만, 결별이나 이혼 후,

익히 아는 남으로 남는 서구인의 의식과

대개 불구대천으로 남는 우리와의

다름을 설명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 결혼 욕구를 자극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만, 결혼이 상대에 대한 

배타적 점유욕인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점유가 풀렸다고 해서

불구대천이 될 일은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 자신의 자유의사로 사랑하고,

언제든 나를 버릴 자유를 가진 그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내게

우연히 쏟는 사랑이 가장 달콤합니다

그래야 할 그가 법의 테두리에서

나를 사랑하기로 하는 겁니다

그가 나를 버릴, 나를 배반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앗아가면서

사랑의 맛도 앗아가는 겁니다


사랑의 입장에서는 '후퇴'이지요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것은 그래서, 

이기적이며, 모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사랑해서'라는 것은

결혼이유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썼듯이, 그런 이유라면

결혼이 '낭만적 투기'가 되기 쉽습니다


주위를 훑어 보면, 대개의 부부는

남자나 여자를 앓는 게 아니라

배우자인 '사람'을 앓습니다

결혼이 사랑의 목적이 아니라

사랑은 잠시 접어 둬도 좋은, 일종의

삶의 형식이라는 걸 방증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므로

결혼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과 하고

결혼은 같이 살만한 사람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요


우리는 사소한 것에도

완벽을 추구하려는 동물이므로

피곤하지 않은 삶마저도

온전히 즐기기는 어려운데,

같이 있어도 좋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삶은 수월할 겁니다



부지불식 간에 빠지는 게 사랑이므로,

우리에게 사랑을 후회할 짬은 없습니다

대개 사랑한 것을 후회한다지만,

들여다보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 행위를 후회합니다

그에 반해 결혼은 법률적 행위로

그 자체를 후회하기 쉬운데,

똑똑한 나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었다는

자부심이 다치기 쉽기 때문일 겁니다


본질적으로 결혼은 서로

남이 아니면 할 수 없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남이 아니면

결혼할 이유가 없으므로

이혼을 배제할 수 없는 거지요


모두 아는 사실을 되새기는 건

사랑은 하면 되지만, 결혼은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혼이 조금 겁나기는 해도

굳이 거부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생리적 자기 방어 기제가

열정으로 소모되는 감정을 곧 고갈시켜

시나브로 정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그래서, 삶을 같이 할

정을 만드는 수단이 됩니다


사랑은 시간과 함께 가며

정은 삶과 함께 갑니다

법이 의미를 잃을 때쯤 생긴 사람의

사잇정이나, 결정이면*

대개 삶이 견딜만해집니다


사랑에 빠진 당신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사랑스럽다는 것뿐입니다

그건 당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보여줬기에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혼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을 보고 싶지만,

그건 결혼해서만 보이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결혼은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 일에 장담이 어렵기도 하고,

결혼에는 인연이 닿는 이가 있다고 하는데

사랑해서 결혼하기보다는, 거꾸로

결혼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상적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는 

사람으로서 같이 살만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어른으로 사는 데에 충분하고, 게다가 

사랑스럽다면, 그건 덤으로 챙기면 되니까 말이지요






*사잇정과 곁정: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함부로 만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삶을 함께 겪어서 생기는 정 가운데, 특히 두 사람의 시점으로 본 것을 사잇정으로 쓰고,

   같은 뜻으로 쓰지만 오래 곁에서 지켜준 사람의 시점으로 본 것을 곁정으로 씁니다.

   전자의 경우, 육정(肉情)이란 말이 있는데, 성적인 면만 보는 것이어서 좀 더 적절한 말이 필요했고

   후자의 경우는 인정(人情)이란 말이 떠오르지만, 말하려는 심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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