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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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제조기




삶이 주는 보상인 건 분명해도,

사랑은, 죽음과 달리 모두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건 아닌 듯합니다

역시 시절인연에 달려 있는 건가요


그렇다 해도,

사랑이 모자라거나 고프면

'나'를 살핍니다

사랑의 주체가 '나' 자신이므로

그대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도 없는 게 당연합니다

시쳇말로, 사랑이 어디,

땅에서 솟아난답니까?


사랑에의 갈증은

합리화가 쉽지 않은 결핍입니다

알다시피, 합리화라는 것은

경험을 나만의 상식으로 만드는

심리적 방어 기제입니다

인간사가 보여주는 굴곡 가운데,

인간이 사랑의 결핍을

상식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무수한 사건을 보면

일정한 틀은 있지만 답이 없는 게

사랑이나 사람살이라는 것이겠지요


사회가 허여하는 틀 안에서

속내를 감춘 채, 우리는

나를 사랑할 의무라거나

감정의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제법 낯선 군중 속을 지나가며,
누가 나를 사랑해 줄 거냐,

묵음 단추를 누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지듯이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다는

헛소리에 위안을 삼거나, 아침에

거울 한 번 더 들여다봤다고

'내가 사랑받을 만하다'라고 생각한다면,

한심한 개츠비와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누군가를 사랑할 의무를 가진 이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밖에 없는 내가

가장 매력적인 때가 어떤 때일까요


누구나 제멋에 겨워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자랑하는 그대 자신의 매력이

흔히 자의적인 것으로 치부될 때

그가 느낄 그대의 매력이라면,

뻔한 이야기이지만,

그대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센 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울 앞에 선다면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옷깃이라도 추슬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나의 사랑은

서로 다른 주체로서의

서로 다른 사랑이므로

서로 무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스러움을 즐기는 데는

나의 의지가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랑스러움을 가진 게

당신인 걸 내가 어쩌겠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나는 즐겁게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보다 쉬운 게

달리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빼앗거나 윽박지를 사람도 없습니다

굳이 말하면, 내가 있기는 한데,

당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당신의 사랑스러움에 빠질 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할 자유를

내게 준 것이며, 이미

나를 위해 할 만큼 한 겁니다


물론, 당신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주면 좋겠지만,

당신의 사랑에 내가 뭐라겠어요

당신이, 거기, 그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것 이외에 당신이 나를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게 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누군가의 가슴에

사랑을 만드는 것보다 더

흐뭇한 일이 있겠나 싶습니다


("마침내 태어나는가 보다, "

분만실 앞에서, 조금은 삶에 지친 채,

자신을 보기 전에는 떨떠름하면서도

어수선하던 부모의 품에 처음 안기며

갓난아기가 제일 잘하는 일이,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의 샘을

그들의 가슴에 만드는 일입니다


글이 옆으로 샙니다만,

그때, 아이가

오직 그 무구한 얼굴과 몸짓만으로

자신의 삶, 인생을 걸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건

요즘, 아이들이 당하는

학대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지만,

문제는 누구든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당신이 사랑스러워

그렇다고 하기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스러움이 해냈다는 걸

당신이 알아챈다면,

커다란 모니터 뒤에 숨어, 아니면

조그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입꼬리를 올린 미소와 함께

하릴없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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