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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Feb 03. 2021

어쩌다, 낭만적

생각편의점

어쩌다, 낭만적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사람 사는 세상에는

섹스와 폭력만 남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맛이 줄어들면서

우리에게 야만성만 남을 거라는

비판적 시각이었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때는

나 자신이 사춘기 때였는데,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여겨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참, 모든 것을 비틀어 볼 때니까요)


다른 말로 하면, 인간만이

그 의미를 새겨온 사랑은

오직 이야기 속에만

남아 있을 거라는 것이겠는데,

정말 그런 때가 올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더라도,

영리한 인간이라면 일부러

깨끗하게 다듬은 손톱을 보이며,

"어디에 야만이 보이냐, 내가 하는 건

사랑이야, "라며 사랑을

고백하며 다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겉으로는 어떻든 

고상함을 가장한 우리 사회는

성조숙증을 앓는 아이 같다고 봅니다

그 속을 살아가는 남성을

낭만적이라고 하는 건

욕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데,

여성이 좀 더 즉물적이라고 하는 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

여성에 대한 편견 탓일 겁니다


여성을 더, 그리고 항상 사랑스럽게

바라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여성이 덜 낭만적인 게 맞다면,

그 이유가 '사람'을 '내' 속에서 키워

세상에 내보고 바로 수유를

할 수 있도록 진화한 여성으로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능동적인 사랑을 하는 이와

수동적인 사랑을 하는 이가 있을 때

능동적인 사랑을 하는 이가

더 낭만적일 수밖에 없는 건

구애행위의 전략적 관계로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마디로, 남성은 좀 더

낭만적이고 싶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낭만에 대한 낭만을 갖고

그 낭만을 진정 즐길 줄 아는 성이,

낭만을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즉물적인 여성인 것은

이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요리를 진정 즐기는 사람이

요리사가 아니라 요리된 먹을거리를

입에 넣는 사람이듯이 말이지요



개츠비의 사랑은 낭만적인가요?


그 책의 제목에 골계가 담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빠져 있는 인물로 봅니다

그의 데이지에 대한 집착은

그 자신이 처했던 환경에 대한

분노와도 겹칩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서는

개츠비의 행동이나 욕구를

사랑으로 볼 수 있고,

그의 삶을 낭만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츠비의 성을 여성으로 바꾸고

한 남성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여성의 삶으로 읽어도 개츠비의 삶이

낭만적으로 보였을까를 생각하면,

위대한 개츠비는 한 여성에게

표면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남성의 '철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거시적으로는 인간의 허영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는 겁니다


그에게 데이지는 애완 팻과 같아서

그 팻이 좋아하는 먹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거라는 착각 속에서

짧은 삶을 살다 간 남성으로, 나는 읽습니다


불우한 자신에의 연민을 해소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를 찾은 그가

데이지를 사랑해서 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데이지가 그의 사랑이었다면,

데이지의 행복을 위해 그 삶이

어떻게 채워져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그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지 데이지의 기호에 맞추려고

부를 거머쥐고 그것을 널리 알리려는

파티를 수시로 연 것이 그가 한 일인데,

가난했던 예전과 달리 자신이 충분히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과시하는 이런 캐릭터는,

개츠비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겉으로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개츠비만큼 자기애에 압도되는

기간이 길지 않고, 대개는

정신과적 상담이 필요하지는 않을 정도로

현실과 타협할 줄 알기 때문일 겁니다



동서양을 넘나든 문화비평가였던

린위탕(임어당, 또는 린 유탕)도

왜 서구의 여성이 남성의 욕구를

거부하지 않고 성적으로 객체화되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현실에서의 서구 남녀의 성역할은

여성의 즉물성이 남성의 낭만성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고착된 듯합니다


자신의 맨살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넥타이로 기름진 뱃살을 감추고

여성을 발가벗겨 무대에 세워놓고는

와인의 고상한 향기를 이야기하면서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탕한

사이비 신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대개의 남성이라고 봅니다


남성의 성에 대한 낭만을 채워주는 데는

그저 멀리서 맨살을 보여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것을 남성 자신은 물론,

즉물적인 여성이 간파하는 데에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덕분에, 우리 사회도

실제 여성이 참여하든 그 이미지를 차용하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수많은

이미지 광고가 제작되고

남성뿐 아니라 같은 여성에게도

소비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18세기 말에 쓰여 19세기 초에 발간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는

엘리자배스의 어머니인 베넷 부인의 입을 통해

여자 나이 쉰이 넘으면

그 자신의 미모에 대한 집착은

딸들(젊음)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로부터 200여 년이나 지난 요즘

수명이 늘어난 덕분에

숫자로 본 나이에는 차이가 없지 않지만,

그나마 우리가 베넷 부인처럼

성에 대해 담백한 편이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뽀글 파마'로 여성성을 놓아 버림으로써

남성의 낭만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같은 또래의 서구 여성이

나이 또는 환경을 이유로

자신의 여성성을 내려놓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는,

남성에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몬 보부아르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서구 여성의 그런 경향과 삶이

동양 여성보다는 담즙질적인 만큼

치열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실, 자연이 가져간 젊음으로

자연이 부여한 젊음과 경쟁하는 것은

필히 패배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기 학대에 가까워 보입니다



사랑에 빠져있는 것 자체가 낭만이지,

사랑은 즉물적일 뿐, 전혀

낭만적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랑하기에 너를 보낸다'는

심리적 서사를 가진 게

여성에 비해 오히려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한 남성이 조금 더 많으며,

사랑에 빠진 남녀 가운데 자신이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여성보다는 남성에 많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철이 없는 겁니다


사랑은 사회적인 감정일 수 없는 탓에

타인에게 사랑을 주장하거나 호소해서

얻을 수 있는 빨대 사탕이 아니란 건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때로,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보낼 수 있다는 남성의 낭만이

그대에게 가소롭게 여겨진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떼를 쓰기보다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떼를 쓰기가

훨씬 쉽다는 건 어떻게 보일까요


어떻든, 앞서, 대개의 남성이

현실과 타협할 줄 안다고 썼습니다만,

그대를 진정 사랑한다면

개츠비와 달리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대를 곁에서 챙겨줄 수 없거나

사랑을 쏟아줄 수 없고, 사랑이 그대에게

불확실한 미래의 볼모가 될 게 분명할 때

"나보다 나은 누군가, 내 대신에

너를 좀 더 사랑해 줄 수 있는 이와

네가 사랑에 빠져도 어쩔 수 없다"는,

이런 갸륵함을 가질 수 있는 게 남성이라면

그들을 '때로' 귀여워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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