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받았어야 할 편지 2

이름 불러주기

by 어뉘

그대가 받았어야 할 편지 2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쓸데없이 살았다는 것이

누가 봐도 명백한 만큼,

나는 벌써 그러려고 하는데,

당신은 내 눈치 볼 것 없이 나를

마음껏 즐겨도 좋을 거예요

물론, 당신이

그러고 싶을 때 말이지요

내가 즐길 수 있는 당신의

삶도 '지금'뿐이니까

나는 그래야겠어요


나만 당신을 만난 게 아니고,

당신도 나를 만나야 했던

삶인 게 분명하니까,

당신이 보여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에 더해

당신의 삶에 관해

알아야 할 건 없어요

나를 만날 삶을 살아온

당신이면 충분하니까요


내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당신의 삶이 나를 만나도록

조작되고 있었던 게 아닐까라면,

함박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그렇게 생각해도 되냐

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당신 없이도 잘 살았던 삶이

왜 당신과 나를 만나게 했겠나,

그렇게 우기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내가, 설마,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그걸 기다릴 만큼

내 마음이 한가하지 않아요


저잣거리의 포장마차에서든,

딱딱한 의자를 늘어놓은

번잡한 카페에서든, 또는

햇볕 없이 바람만

마구 불어대는 뚱한 겨울날의

신촌역 3번 출구에서든

당신을 기다리는 데에

세 시간 이십 분을

가뿐하게 넘길 수 있는 건,

당신이 보이지 않는 시간보다

당신을 본 순간이, 자주

영원 같아서 그럴 거예요

혹시, 이런 나의

비관주의자적 당신 읽기가

당신에게 고소하다 해도

그것 역시 나는 어쩔 수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그만큼

사랑스러운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기다릴 수 있다고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일 거예요

얼마나 내가 당신 덕분에

유치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유치하다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당신의 사랑스러움이

내가 그래도 된다고 나를

가르친 건지도 모르잖아요


물론, 그런 나를 당신이 즐긴다면,

내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닐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내가 뭐든 배우는 걸

꺼리는 사람은 아니긴 해도,

당신이 즐거울 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는

벌써 알아두지 않았겠어요


당신이 사랑스러운 게,

내가 일부러 그렇게 보려 하거나

작위적 시각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 걸요


그래서 당신이 가진

아름다움은 믿지 않겠어요

내가 사랑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그것뿐일 거예요

당신을 순수하게 객관 하기는

이미 글러 버렸으니 말이에요

내 마음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마음대로 볼 게 분명하거든요


뭐, 오늘도 당신이 아름다워서

푹 빠져버릴 게 분명한데,

오늘의 당신이 내게 어떤

또 다른 의미로 보일지,

제시간에 당신을 보려면

이제 집을 나서야 할까 봐요


다만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당신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있나

스스로 되돌아보며,

오늘은 제대로 보겠다고

벼르지 않아도 되면 좋겠어요


삶의 버킷리스트와 달리,

사랑을 위한 버킷리스트는

길수록 즐거운 거니까

'함부로 마주 보기'도 적어두면

괜히 설레긴 하겠지만

우선은 당신이 왜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왜 내게 당신이 즐거운지,

당신이 허락하면, 그거 확인하기를

첫 줄로 써넣어야 할까 봐요



아, 늦겠어요

지금 나가요

이따가 봐요












매거진의 이전글그대가 받았어야 할 편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