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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Sep 16. 2022

남성을 벗겨야 할 이유

생각편의점


남성을 벗겨야 할 이유




오래된 영화, 알 파치노와 미셀 파이퍼 주연의 <프랭키와 쟈니 (1991)>라는 영화에는, 두 사람의 갈등이 어느 정도 해결된 시점에서 쟈니가 긴 잠옷을 입은 프랭키에게 옷의 앞섬을 15초 정도만이라도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훨씬 전에 이미, 대도시 뉴욕의 외로운 싱글들로서 엄경천 변호사의 표현대로 <성의 불법적인 소비>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프랭키에게 그날의 요구는 생소했겠지요.


"앵무새가 있었어요. 나는 싫어했어요. 새가 죽자 기뻤지요. 새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사촌은 내가 앵무새를 사랑할 거랬죠. 사랑은커녕, 노래를 해달라면 가만있다가, 듣고 싶지 않을 때는 짹짹거리고, 그 지겨운 긁는 소리는 또 뭔지. 또 갖게 되면 개를 가질 거예요. 품에 안을 수 있는 걸로. 앵무새를 느낀 건 죽어서 갖다 버려야 했던 때였어요."

 

자니의 요구를 거부했던 프랭키가, 결국, 앞섬을 열고 쟈니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으로 서서 하는 말입니다.


이 장면은, 한 여성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모습입니다.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어린 날에 만난 남성에게서 받은 물리적 폭력과 그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프랭키가, 그 순간 그 자신만의 페미니즘을 완성했다고 해석합니다. (다른 한편,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는 쟈니의 요구에는, 성적 욕구와는 다른 인간에 대한 관심이 섞였다고 봅니다.)


감독은 이미 프랭키에게, 보드카로 외로움을 달래며 혼자 살다가 외롭게 죽어가는 직장 동료를 보여주면서 프랭키 자신도 그렇게 죽어갈 거라고 압박해 놓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잠옷의 앞을 열기로 한 프랭키의 결정에 일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말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성을 과시하는 것과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건 다릅니다.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그 두 가지를 마구 섞어 씁니다만, 성숙한  남성이란 성을 과시하는 여성은 의도적으로 방관한다 해도, 성적 매력을 풍기는 여성에게는 호의를 보이는 남성일 겁니다. 한 마디로, 성이 함부로 벗지 않도록 막아주는 인간일 겁니다. 나는 이것을 남성 페미니즘의 시작점이라고 봅니다.




- 남녀가 서로 스쳐 지나간다. 여성은 다소곳해도 좋고, 만 무방한 모습이어도 좋다. 남성은 시쳇말로 껄렁껄렁한 모습이어도 좋고, 건전한 시민의 모습이어도 좋다. 남성이 지나치는 여성을 흘낏 본다. 순간, 남성은 여성을 제압하기 위해 덮치고 둘은 어이없는 실랑이를 벌인다. 여성이 저항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즈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덮친 남자를 제압한다. 여성은 자신을 구한 남성에게 호감을 갖는다.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된다 -


흔히 보는 영화, 드라마에서의 남성과 여성이 만나게 할 때의 모습입니다. 클리세라고 봐도 될 겁니다. 

의미를 뚜렷하게 하기 위해 성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직장에서의 업무, 좋아하지 않는 책, 음식의 맛 등 다른 소재로 남녀를 연결하는 상투적 상황 구성에 쓰입니다.


이런, 여성이  뭔가 곤경에 처하거나, 고민 또는 어려움에 대한 남성의 도움을 받고 그에게 호감을 갖는 이야기가 꼭 '남성'만의 꿈은 아닌 모양입니다. 여전희 그 클리세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아도, 비슷한 꿈을 꾸는 경우가 흔합니다.


여기에서  의아한 것은, 여성이 자신을 구한 남성에게 마음을 던지는 것입니다. 따져보면, 그 역시 남성이며, 그가 잠시나마 강간하지 않는  남자였던 것은 앞서 강간하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간당하지 않은 여자는, 남성과 연인으로 발전하고, 자신을 구해준 강간하지  않은 그 남자에게 결국 강간당할 수밖에 없는 여자가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쓰는 저 위의 클리세 역시 남성의 여성에 관한 순수한 보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적절한 행동이었을 수 있지만, 보호는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남성의 여성 보호는 보상이나, 대가가 따르는 보호입니다. 그가 강간하는 남자와 다른 것은, 그 역시 강간할 수 있는 남성이지만 그것을 여성에게 강제하지 않는 정도입니다.  


남성에는, 그가 무엇을 하는 인간이든 성에 관해서는 강간하는 자와 강간하지 않은 자로 구분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노골적인 표현이어서 미안한데, 순화해서 말하면, 성을 드러내는 자와 성을 감추는 자들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두 남성이 전혀 다른 듯하지만, 당장이 아닐 뿐, 후자 역시 언제든 강간할 수 있는 남자인 건 맞습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덕분에, 성적 주도권 다툼에서 여성이 대체로 남성의 상위에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성으로부터의 강간, 성추행, 성희롱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지속적인 관계는 인간 사이에만 가능할 겁니다. 성은 소비재이므로, 늘어가는 나이와 함께 언젠가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성적 주도권만으로 상대를 얽매는 건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이 개입되는 한 페미니즘의 완성은 있을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무엇을 보고 말하고 즐기는지 우리를 둘러보면, 매체 안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주 관객을 남성으로 잡고 있는 듯한데, 실제로 여성 관객도 스크린에 뜬 그림을 즐기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개의, 비교적 단 시간의 프로젝트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제작되는 영화 등의 매체에서, 전라의 여성의 모습이 1초라도 담길 때, 찾지 않아도 눈길만 가면 보이는 남성의 성기를 거의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항의하지 않는 것은 이 사회에게나, 남성에게 여성을 객체화할 환경, 또는 권력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주목의 정도가 어떻든 이야기를 가진, 관객을 유혹하는 매체에서 인간이 전라로 맨살을 보이는 경우, 대개 여성의 모습입니다. 나는 왠지 이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온전한 페미니즘의 수용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성을 벗겨놓은 반면, 남성은 기껏해야 상체를 드러내는 정도이거나, 어깨 각을 세운 정장을 걸친 모습으로만 담기는 장면에 대해 거부감을 격하게 말하지 않는 한 페미니즘 완성이 요원하리라는 겁니다.


그런 환경을 만든 데는 서양 여성의 성에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페미니즘이 서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은, "서양 남성들, 특히 미국의 남성들이  동양 남성들에 비해 행복한 이유는, 백발의 나이에도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계발하기 위해, 또는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서양  여성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한 <린위탕> 선생의 관찰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동양인 가운데에도 같은 노력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서양 여성의, 나이를 불문한 성적 어필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노력은 페미니즘 운동에도 크게, 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페미니즘이 의미가 없게 되는, 다시 말해 그것이 수용되는 시기는 여성의 벌거벗은 모습과 함께 자연스럽게 담겨야 할 발기된 남성의 성기가 함부로 보여도, 그 장면이 개연성을 가졌다면 우리의 눈이 스스럼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포르노 영화가 아닌데, 왜 이 장면에서 남성의 성기를 보여주지 않을까, " 그 장면에 담겼어야 할 발기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남성 배우를 연기력의 문제로 비난하며 좋은 배우가 아닌 것으로 평가하는 우리가 되고, "남성의 성기가 보이면 포르노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 그렇게 연출하지 않는 감독이 사과의 의미로 분노한 대중 앞에 무릎을 꿇는 사회가 되어야 페미니즘이 제법 분발하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하면, 위의 서술은 그릇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대개의 남성이, 여성에게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는 것에, 여성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수치심을 갖고 있다는 심리적 약점은 무시한 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남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기를 여성 앞에서 함부로 내보이지 않도록 '여성'이란 성이 남성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남성성을 가진 인간에게서 노출증이 좀 더 많은 건, 그런 탓도 있을 겁니다.  


그 수치심을 역으로, 성적 괘감의 도구로 쓰는 인간이 노출증 환자일 겁니다. 이제 와서 남성에서 '인간'이라고 쓴 이유는 노출증이 남성 마초(Macho) 가운데 흔하긴 하지만, 여성 엠브라(Hembra) 가운데도 있기 때문입니다. 


노출증은 형태가 달라도, 모두 수치심마저 감추려는 정서적 결벽증과 상통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보통 '수치심'을 감추려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감춰지지 않지요. 내 안에 내재된 틀이니까요. 우리가 감추려는 것은 수치 자체입니다. 노출이 수치와 연결되지 않게 되면, 대개의 남성이 가진 잠재적 노출증도 사라질 겁니다.


"좀 더 보자,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

페미니즘이 완성되면, 노출증 환자는 오히려, 서둘러 그들에게 접근하는 이들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다가 모두 자의적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상, 맨몸을 가리지 않는 게 수치라면, 옷은 맨몸을 가리면서 수치를 깨닫게 하니까요.


(의외로, '헬스'로 몸을 만든 남성들이 벗을 때는, 그 근육질 몸매를 만드는 데에 거의 모든 테스토스테론을 쓰면서, 대개 성욕이  평범한 일반인에 비해 한참 부족하거나 거의 없기 때문에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매력과 성욕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남성의 근육은 페미니즘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군복의 발달과 함께 개량되어온 남성의 정장을 보면, 완력과 남성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천의 무늬 이외에, 그 대체적 외양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성이, 누구도 그가 남성임을 부인하지 않는데 왜 남성성을 강조해야 할까요? 조직된 인간사회에서 남성의 관습적 역할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정장은 자신의 상대적 나약함을 감출 수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전쟁을 치를 군인으로서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모습으로 발전했기 때문이긴 합니다. 실제로, 정장을 걸치면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남성도 있고, 그런 정장을 한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여성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여성해방은 남성에게서 시작되는 게 쉬울 것 같습니다. 여성해방을 열심히 외치기보다남성을 자신의 남성성에서 해방시키는 겁니다. 인간으로서 여성과 남성이 같다고 주장하기보다, 남성 스스로 남성성을 벗도록 만들면, 여성해방이 좀 더 빠르게 진행될 겁니다.


널리 알려진 남성성에 대척하는 위치에 있는 관념들, 즉 나약함, 우유부단함, 남성 속에 감춰진 여성성, 소심함, 유치함, 비굴함, 쩨쩨함과 그 밖의 남성이 함부로 즐기지 못하는 사회적 관념에서 해방시켜주어야 대개의 남성이 기꺼이 여성해방을 받아들이고, 즐거운 반려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엊그제, 서울 지하철 역 구내에서 일어난 전 동료 남성의 입사 동료에 대한 보복 살해는 남성성의 '보잘것없음'에서 비롯되어, 그것을 감추려 했던-그래서 타인의 성을 남몰래 들여다보려 했던- 한심한 수컷에 의해서 일어난, 일어나지 않아야 할 범죄였습니다.


이 사회는 동료, 동지, 사우, 동호 회원 등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남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본분을 지키고 행동을 자제하라고 요구하지만, 사회의 외적 분위기가 그런 것이지, 어떤 집단, 모임이든 성 역할을 누를 뿐 성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왜 남성에게 주도권을 주었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를 따져, 남성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먼저 남성을 벗겨야 한다고 봅니다. 남성 자신의 삶은 가벼워지고, 여성의 삶도 지금보다 훨씬 편해질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남성이 즐거워하는 사회가 서둘러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 남자야. 도대체 왜 굳이 남자인 척하는 거니? 인정해줄 테니까, 벗어봐. 봐줄게. "







P.S. 조금 길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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