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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Mar 01. 2023

수상한 시절이 맞다면

생각편의점

수상한 시절이 맞다면




어쩌다 짬이 난 덕에

잠깐 할 일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래도 되나, 혹시 

할 일을 잊은 건 아닌가"


잠깐의 여유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하거나

서먹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해야 할 일'에 맞춰 

학습된 덕분일 겁니다


맨 푸른 하늘보다는

구름 한 점 걸려 흐르거나, 

아니면 바람 한 올이라도

머리카락 사이에 머물러야

맥쩍잖게 느끼는 것도

같은 심리적 맥락입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들썽이는 마음을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순간조차

우리가 열심히 산다는 방증입니다


못 지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그린 시간표를 

벽에 붙이며 

흐뭇해하던 그때도 

우리는 열심히 살았던 겁니다


사실, 그게 일상이어서

열심히 산다기보다는

그렇게 살아내는 게 삶이지요 


그 버거움을 잊게 하는

열정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찐 밤고구마 두어 개 

목에 쑤셔 넣고 사는 듯한 때를 

열정으로 채우는 건 어렵습니다


굳이 우리 삶에서

열정적이라고 할만할 때는 

먹을 때, 배설할 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잠잘 때 정도로, 대체로 

생리현상과 맞닥뜨렸을 때일 겁니다


죽지 않으려고 살면서

여지없이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

열정적으로 끝을 향해 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삶이 고달픈 걸 겁니다


다행인 것은

불행, 또는 행복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해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나름에 따라 다르다는 겁니다


요즘, 상상이 파고들 여지가 없이

엄연한 삶밖에 없는 시기에,

그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데는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나 싶습니다


왕가위의 영화와는 관계없이 

말 그대로 '내' 삶의 사적인 

화양연화(花樣年華), 아니면

의미는 조금 다를지라도

벨 에포크(La Belle Epoque)라고 

할 수 있을 때는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일 겁니다



많은, 영리한 이들이 그러듯이

그저 삶을 앓느니, 지금

사랑에 빠지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저 막말로, 죽지 못해서

버티는 때와는 달리,

흐드러진 그 '봄'을 건너면

서너 해가 마치

한 해처럼 지나간 

뒤일 수도 있으니까요


누구를 사랑하나, 아니면

무엇을 사랑하느냐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혹은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사랑이 

고달픈 나를 위로합니다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나 자신이 나를 위로합니다

하기야, 애착인형이 스스로

나의 사랑을 받는 덕분에

물불 가리지 않을 일은 없겠지요 


나의 애착담요, 

혹은 반려견, 반려묘가,

그리고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 '그'가 

나를 위로합니다


"사랑하게 되지 않아, "

그가 나를 부담스러워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도 역시 사랑이어서,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는

감정의 성숙함이 나를 위로합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 탓인가 싶고,

그를 사랑해서 그의 탓인가 싶지만

기실, 나를 망가뜨리는 건 나 자신입니다


창피하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고,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으며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가진 그일지라도,

그가 사랑스럽다면 

나를 위해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장담하는데, 그 사랑이

울증(鬱症)에 빠질까 두려운 

이 몇 년을 

훌쩍 지나가게 할 겁니다 




.........


 Without love, You are not in living, but in maintaining not to be dead. 

                                                                         - A Romantic Excuse by d-GA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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