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편의점
어떤 도시를 가든,
서울 사는 이들이 서울 아닌 곳에
첫발을 띄면서 느끼는 건
촌스럽다는 것일 겁니다
서먹하거나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도시의 공기에 시달린 덕분인지
촌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런 동네 가운데 하필이면, 연이은
열대야를 가져오는 뙤약볕 아래
원주의 박경리문학공원을 간 것은
다른 곳을 쉽게 갈 수 없게 만든,
설비는 같지만 운영하는 모습은
촌 동네가 분명한 대중교통 덕분입니다
이미 인간에게 할 짓은
다 하지 않았나 싶은
신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그 삶에서 남긴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거꾸로 보면,
그가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것이 훨씬
더 많았다는 말이 되고,
삶을 가진 우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기념할 만한 '나'를
살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백과 공백처럼
하지 못한 것과 해놓은 것의
절대적 가치는 같을 겁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할 수 없듯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놓은 것들에 대해서
칭찬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쨌든, 그 공원이 만들어진 이유가
'토지'가 어느 해 8월, 그곳에서
25년의 집필에 마침표를 찍었고
박경리의 삶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시간과 삶을
풍부하게 해 준 모든 작가들에게
그들이 남긴 작품에 맞는
그들의 삶을 기대해도 좋을까요
칸트, 페스탈로치, 김기덕,
린위탕, 이시하라 신타로,
도스토예프스키, 베르톨루치,
헤밍웨이가 살았던 삶에
갈채를 받아야 할 당위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처럼,
칭찬보다는 비난해도 좋은,
비난해야 할
수많은 순간들을 보게 될 겁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마침내 가면을 벗고마는
인간이 드물지 않아
인간을, 그가 죽기 전에는
판단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궤변도 갖다 붙이는
비평가라는 이들의
뜻 모를 소리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삶이 그가 남긴 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항상 도덕을 말한 작가가
도덕적이냐고 묻는다거나,
철학을 하는 철학자가
철학적이냐고 묻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미련한 질문일 겁니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는
방증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는 도덕적, 또는 철학적이어서
도덕, 또는 철학을 쓸 수도 있고,
전혀 도덕적, 철학적이 아니어서
도덕, 철학을 쓴 것일 수도 있으며,
오히려 도덕, 철학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도덕, 철학을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도덕자,
철학자인지는 몰라도,
인간적이라는 건 틀림없으므로
삶에서 존경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은 미련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이
그들의 실제 삶과 어떻게
연결되지 않는가를 따져보면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는지를 따져보는 게
영리한 짓일지 모르겠습니다
삶을 자신이 정한 틀에
가둘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작가이든 아니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결국
이런 여유를 갖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았겠지."
그 순간,
살아있는 자의 우월감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을
만드는 것과 같을 겁니다
그 문학공원에는
관련된 소품과 원고,
손수 만들어 즐겨 입었다는 옷,
그리고 박경리 삶의 연대기를
벽 하나에 밝혀놨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말대로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작가를 읽으려면
'토지'를 읽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전권을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그가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느낌 이외에 거기 자료들에서
박경리를 읽는 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합니다
살아 있을 때의 그가
수많은 인간들을 그려낸
신이었듯이,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자의 엄연함으로
그가 남긴 것들로도
그의 삶을 연상할 수 있는
신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숙소로 가는 길에
내가 사람을 구별하는 방식,
"사랑스러운가,
사랑스럽지 않은가" 가운데
그를 사진 속의 모습 이외에
맨눈으로 본 적도 없으면서
'사랑스럽다' 쪽에 세우고 싶은
나의 망설임이 괜히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