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뉘 Mar 13. 2024

쇠똥구리와 양해

생각편의점

쇠똥구리와 양해




미움을 어떻게 드러내느냐는

개인의 기질 나름입니다만

미워할 줄 아는 우리가 더욱

사랑스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어야

미워할 줄도 알겠기 때문인데,

약간 다른 각도로 보면,

사랑받을 줄 아는 우리가

사랑할 줄도 안다는 겁니다


사랑받을 줄 모르는 이들이

권력을 잡는 바람에 요즘

'뻘짓'들이 일상인가 싶습니다만,

뙤약볕 아래 소똥 몰이를 하는

쇠똥구리의 삶이, 

혹시 우리 눈에 가소로워 보이면

쇠똥구리의 눈에 우리 역시

그렇게 보일 겁니다

"왜 저렇게 사는 거야!"

쇠똥구리는 격렬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중이며

그 삶을 자신은 모르겠지만,

인간이 보기엔 자연을 

청소하는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죽어가는 게 삶인 게 틀림없고,

삶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삶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양해'하는 것인 듯싶습니다


그 양해가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 태도를 갖게 하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사랑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쇠똥구리는 우리에게 귀여우려고

귀여운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쇠똥구리가 보기에 귀여운 짓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우리가 귀엽게 보면, 귀엽습니다


양해가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받고 있는

쇠똥구리의 삶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도 시간의 연역에 맡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가소롭게 보는 건 문제가 없으나,

우리가 쇠똥구리를 내려다보듯

인간의 삶에서 가소로움을 보는 건

그 삶을 가소롭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뿐입니다


논리적이나 과학적이지도 않은

삶 자체에 대해서 근거가 희박한

주장만 갖고 있는 우리의 삶에

양해가 삶을 긍정하게 하고, 그것을

때로 철학한다고도 합니다




이미 아는 것이지만,

양해라는 것은 수동적인 것으로

체념이 섞이지 않을 수 없는데,

사랑이, 그래서 좀 더 즐거울 겁니다

사랑은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말로는, 마치 사랑에 의지가 있는 듯 

제 눈에 안경인 '그'를 만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하면

누구든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

'제 눈에 안경'을 쓰게 될 겁니다


그런 사랑에 덴 뒤에는

사랑에 관한 한 우리의 보수성이 

더욱 강해지지 않나 싶은데,

내가 그 '대개'에 속하지 않고

사랑을 읽는 눈이 진보적이 된 건

순전히 나 개인의 취향 탓입니다


사랑의 미래를 읽으려 하고,

현재를 벗어나지 못하며 

미래를 기약한 우둔함,

그걸 제대로 깨달은 겁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어떤 맹렬한 마음과 방식으로 

사랑을 쓰고, 약속을 했든 

그 마음의 기록과 약속은 

서로 사랑하는 동안까지만 

유효하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도, 사랑에 빠지고,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정신적 피학의 즐거움은

삶이 줄 수 있는 즐거움 가운데

으뜸인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정신적 피학인가 하면,

그가 나를 창피해하지 않도록

그의 사랑에 얽매여

'보다 나은 나'가 되려는 

나 자신을 구박하면서도

그걸 즐기게 되는 까닭입니다


어쨌든 그를 사랑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며

그가 나를 사랑하는 건 

그의 몫이라는 걸 알고

우리가 사랑받을 줄 알면,

자유의지로 던져주는

그의 그윽한 눈빛만으로

우리는 절정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아마, 그것도 삶을 양해한 이들이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하필 여자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