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엎지르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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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를 물을 때는 늘 즐겨야 한다고 말해줄 요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어떻게 즐기느냐 하는 질문을 할 텐데, 그때는 개성을 이야기해줄 생각입니다. 순우리말로는 ‘나름’으로 쓰면 될까 싶습니다.

크게, 아주 거시적으로 보아서 인생 칠팔십은 인간 역사에 비하면 한 줄기 바람과 비슷할 겁니다. 그 바람 속에 나는 뭔가 싶을 때, 살 맛이 없어지는데 그나마 ‘나름’이 있어 다행으로 여깁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 첨단과는 동떨어진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나’를 즐길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을 어떻게 얻는가 하는 것이 생활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즐기는가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라고 여깁니다. 카렌 브릭센(혹은 아이작 디네센)은 그의 자전적 소설 ‘Out of Africa’ 안에 ‘Kitosch’s Story’란 제목으로 짤막한 경험담을 쓰고 있습니다. 그 소설은 1985년, 영화화되었는데, 메릴 스트립,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했습니다.

케냐의 몰로에 살던 Kitosch라는 소년은 백인 정착민의 시종이었습니다. 어느 6월의 수요일 낮, 아이는 그 정착민의 명령을 받아 빌려주었던 말을 찾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명령을 성실하게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되찾아오면서 타지 말고, 끌고 오라는 명령을 어기고 말을 타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토요일 낮, 백인 정착민은 소년이 명령을 어겼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요일 오후 소년은 매질을 당하고 기둥에 묶인 채 창고에 감금되었습니다. 백인 정착민은 그 소년을 지키라고 원주민 요리사와 토토(Toto)족 요리 시종을 그와 함께 창고에 두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매질을 당할 때 귀를 다쳐 듣지 못했던 소년은, 그날 밤 자신을 지키는 토토에게 자기는 도저히 도망갈 수 없으니 묶인 발을 풀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토토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자, 소년은 토토에게 죽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 네 시에도 또 죽고 싶다고 합니다. 잠시 후 소년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좌우로 흔들다가 “I am dead!”라고 외치고 죽었습니다.


낮에 있었던 백인의 매질 외에 다른 위험은 없었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물리적, 또는 생리적으로 그 자신의 생명을 앗을 수 있는 걸까요. Kitosch의 죽음 관련, 재판을 위해 나이로비에서 온 두 명의 백인 검시 의사는 매질, 굶주림, 그리고 “Wish-to-Die”가 사인이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이 “Wish-to-Die”는 유럽인의 의식에는 없는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만 보이는 것이라고 카렌은 쓰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아프리카인에 비해 유럽인이 문명화되었다고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들 역시 문명화되기 이전 그런 의식의 변화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카렌은 이 소년의 짧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맺습니다.

“By this strong sense in him of what is right and decorous, the figure of Kitosch, with his firm will to die, although now removed from us by many years, stands out with a beauty of its own. In it is embodied the fugitiveness of the wild things who are, in the hour of need, conscious of a refuge somewhere in existence; who go when they like; of whom we can never get hold.”

(비록 우리에게서 떠난 지 여러 해이지만, 그의 내부에 있는 정의와 품위를 구별하는 강력한 감각에 의한Kitosch란 존재는 죽으려는 굳건한 의지와 더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도드라진다. 그 안에 도저히 구속할 수 없는 존재로서, 스스로 원할 때 움직이며, 필요할 때의 삶의 피난처가 어딘가를 알고 있는 야생의 덧없음이 구체화되어 있다.)---번역을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군요.^^


이 이야기에서, Kitosch가 인식한 '나'는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거할 정도로 격렬함을 보입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한 것이겠지요.


남들이 확인해주는 나의 즐거움이 아니라, 내가 나를 즐기는 그런 <나름>이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넥타이로 목을 묶은 정장 속에 감춰졌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 소년과 같은 본성을 갖고 있다고 여깁니다.


소년의 죽음을 보며 ‘나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너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습니다. 소년이 소년 나름의 삶을 살았다고 할 때, 우리는 소년이 가졌던 자유로운 삶에의 치열한 욕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유럽인이 그랬던 것과 같이 말이지요.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지는 않거든요. 그렇다 해도 요즘의 우리는 즐거움이란 것을 개성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내’ 삶은 ‘내’가 즐겨야 하는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나 아닌 타인은 '너답다'라고 합니다.


‘너답다!’라고 하는 경우, ‘엎지른 물’을 빗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렇다고 물을 엎지른 사람이 즐겁지 않아야 할 까닭도 없고, 오히려 쏟지 않은 즐거움과 쏟을 수도 있는 즐거움, 그 둘 다 찾는다면 삶을 즐기려는 치열함에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나'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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