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1년 전에 지게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또 2월엔 지게를 만들어 돈을 한 짐 실어 주겠다고 했었다.
연애시절부터 남편의 공약은 공수표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약속을 하면 마음속으로 이건 하겠다 이것은 못하겠다는 판단을 하고 어떤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콧방귀를 뀌면 왜 말이 안 되냐고 자기는 '거짓말하면 코피가 나는 사람'이라며 진지한 체를 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연히 공수표)
결혼 전 용인의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으로 놀러 가면 '정원이 예쁘다 나중에 그런 정원 꾸며주겠다'라고 약속을 했었다. 지금은 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꾸고 놀이시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30년 전 그때는 자연농원이라는 이름에 맞게 각종 화초가 엄청나게 넓은 땅을 차지하고 계절마다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이 공약은 당연히 공수표일 수밖에 없다. 일단 규모나 모양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려니 인정이 된다. 저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주겠다는 말과 같은 수준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땐 아주 멋진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게 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며 속으로 좋아한 걸 보면 저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준다는 뻔한 거짓말은 필요한 것 같다.
(혹시나, 하지만)
결혼 20주년이 되던 해에 지인들과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갔었다.
일부러 기념에 맞춘 여행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무슨 기념일이나 생일등을 그냥 지나치기 일쑤고 어쩌다 맘먹고 서로 챙겨줘도 어차피 사야 할 옷가지나 신발 등에 '~선물'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면세점의 명품가방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골라보란다. 명품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결혼기념일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주고 싶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이 신났던지라 큰맘 먹고 고르고 골라서 가방 말고 지갑 하나를 들고 나왔다. 브랜드도 익숙한 것은 더 비쌀까 봐 조금 덜 익숙했던 곳에서 색깔이 예쁜 지갑을 골라왔다.
(역시나)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 달 신용카드 지출 명세서가 배달되었다.
웬만해선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을 때다. 구입내역과 날자 상호를 확인하니 그게 그거였다.
선물로 받은 지갑.
'이건 선물 사기다. 카드로 사는 게 어딨냐, 생색은 당신이 내고 지출은 생활비가 하냐.'라고 따져 물어도 남편은 그냥 허허 웃고 말았었다. 그 선물 사기극 이후로 무엇을 사주겠다고 하면 카드 지출인지 본인 용돈으로 하는 현금지출인지 확인을 하게 되었다.
(사기와 진심의 중간)
하여튼 이런 식인 남편이 작년에 약속했던 지게를 지난 2월에 만들어 줬다.
그 당시 남편은 지게를 5개나 만들었다. 내 것과 이모것 그리고 한옥학교 선생님들의 부탁으로 3개 더 만들었다. 지게 만드는 게 너무 쉬워 보였다. 마침 생일을 맞이한 지인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던 나는 지게를 하나 더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남편은 기꺼이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지인의 생일까지 지게를 만들지 않았다. 서둘러서 만들어 달라고 재촉하는 내게 더 예쁘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것도 지게 한 짐 가득 돈을 실어서 줄 테니 있는 것을 먼저 지인께 선물로 드리라고 했다.
'그럼 빳빳한 현금을 가득 실은 지게를 선물로 달라고, 이왕이면 5만 원짜리로만 채워 달라.'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포장을 이쁘게 하면 적은 양이라도 한 짐 만들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지게 가득 꽃과 돈이 실린 모양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은근히 3월 결혼기념일엔 뜻밖의 이벤트를 기대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4월엔 내 생일이 있으니 그날 주려나 보다 했으나 또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지나쳤다.
'또 공수표였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섭섭해졌고 한편으로는 이미 선물 받은 지게를 내 지인에게 선물한 것이라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게에 대한 추억이 소중해 남편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지게 만들어 주면 안 잡아먹을게.' 했다가, '지게 만드는 사람 어디 갔나.' 그랬다가 '생일도 지나서 이제 삐지기 직전이다.'라고 협박을 했더니 지게는 금방 만들면 되지만 투자한 주식 종목이 자꾸 떨어져 손해를 보고라도 팔아서 줘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남편이 손해를 보고 얻는 선물이라면 싫다고 수익이 날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종목을 확인하고 내 관심종목 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그 종목을 관심 갖고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쑤욱 올랐다. 남편이 혹시 못 보고 있을까 봐 올랐다고 알려주었으나 며칠 더 지나면 더 수익이 날 거라며 매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주가는 하락했다. 주식이 조금 오른다고 돈방석에 앉을 일도 없을 텐데 욕심을 부린다고 화를 냈다. 남편에게 이제 지게나 돈이나 주식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도 했다. 왜 혼자 약속해서 들뜨게 해 놓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만들어 놓냐고 다음부터는 뭔가 해주고 싶다면 일단 주고 나서 말하라는 말도 해버렸다.
남편도 일단 지게를 만들고 수익이 난 것을 팔아서 주겠다며 화를 냈다.
어라,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닌데 꼭 남편 등골 빼는 여자처럼 말하는 게 어딨냐고 따져 묻다가 갑자기 남편은 지게보다 용돈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100만 원 주고 싶었다."
"싫다, 너무 많다. 30만 원만 있으면 된다."
"안된다. 그건 너무 작다."
"그럼 50만 원으로 올리고 수익이 난 것 팔면 달라."
그래서 웃으며 합의를 봤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평일엔 일이 바빴고 주말엔 친정으로 시댁으로 다니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지게를 만들었는지, 주식은 팔았는지 또 물어보았다.
이쯤 되면 빚쟁이 수준이다. 다른 공약이었다면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지게에 집착을 하는 내게 화나고 이런 공약을 한 남편이 섭섭하기까지 했다. 내가 그 돈을 받아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속이 상할 즈음 남편은 주식 일부를 처분했다며 싱글벙글 좋아했다.
금요일 늦은 시간까지 시장 보고 정리하고 11시가 넘어서 방에 들어왔는데 조금 뒤에 즐거운 얼굴의 남편이 장식용 지게에 돈을 실어 들어왔다.
그. 런. 데
아, 진짜, 이건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게 아니다.
바지게에 꽃과 돈이 함께 있는 그림을 상상했더랬다. 상상만 한 게 아니라 말로도 전했었다.
그래도 즐거워하는 남편에게 이쁘다고 너무 좋다고 감동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마음보다 솔직한 입이 먼저 말해버렸다.
"이건 사기야, 처음 약속이랑 다르잖아, 난 예쁜 바지게가 있는 지게가 필요해."
남편은 주고도 욕먹는 거 같다며 섭섭해했다.
이 글을 쓰는데 남편이 들어와서는 자꾸 방해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읽어주고 물었다.
"어떻게 마무리해 줄까요? 어떤 마무리가 좋아요?"
"알았어, 알았어."
이 말을 믿고 또 기다려 봐야겠다.
남편이 돈방석에 앉게 해 줄 일은 없겠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예쁜 돈지게는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
바지게 없는 돈지게 (이건 분명 미완성이다) , 글이 발행된 이후에 완성한 바지게가 있는 꽃지게
https://youtu.be/5_z7569_G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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