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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이모 Jan 01. 2022

엄마의 60년 손해와 아버지의 편지

엄마한테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자상하길 한가, 돈을 벌어다 주길 하셨나, 건강하지도 않아, 매일 큰소리만 쳐, 먹지 말라는 술은 또 왜 그렇게 좋아해, 그런데 엄마는 아버지한테 너무 잘해요. 왜? 엄마는 왜 아버지한테 잘해요?

그냥 같이 사니까 하는 거지.

부부로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엄마처럼 잘하지는 않아요.

혼자 일하다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가 있으니까, 혼자 있는 거 보다는 덜 적적하니까.

큰언니의 진지한 질문에 엄마는 무덤덤하게 답을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세 살이 어리지만 훨씬 늙고 허리는 펼 시간이 없어 기역자가 되었다. 집 안에서 티브를 보고 책을 읽고 그러다 피곤하면 누우시는 아버지는 당신 나이보다 10살은 어려 보이고 피부는 맑고 뽀얀 하다. 아무리 봐도 엄마가 더 고생하고 힘들고 지쳐 있으면서도 아버지 드실 것을 먼저 챙기고 아버지 건강을 더 걱정하신다.


"난 기억해, 황부자 댁에서 엄마를 며느리로 달라고 했는데 양반집에 시집보내고 싶어 아버지한테 주신 거라고, 고생하며 사는 거 보며 후회된다고 외할머니 살아계실 때 말씀하셨었어,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께서 두 가지 실수를 하셨는데 한 가지는 엄마를 황부자네 며느리로 보내지 않은 거고 또 하나는 아버지를 사위 삼으신 거지."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 할머니랑 저 건너 아주머니랑 오셔서는 물을 달라고 하시더라, 물을 떠서 쟁반에 올려 가져다 드리고 하던 일을 했지, 그게 선보러 오신 거였어, 아버지는 언덕 위에서 먼발치로 쳐다만 봤다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사주단자가 오고 혼인식을 올렸지."


"진짜 말도 안 돼, 서로 얼굴도 보고 사람이 건강하고 성실한지 알아보고 결혼해야지, 얌전하게 집에서 일만 하다가 어느 날 낯선 남자하고 결혼해서 자식을 넷이나 낳고 말이야, 엄마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고생만 하고 엄청 손해 보셨잖아요, 언니 말대로 아버지께 왜 잘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억울하거나 속상하지 않아요?"  


"손해? 엄청 손해 봤지, 화장품 판매하고 집에 올 때 가방은 어깨에 메고 그 손으로 머리에 인 곡식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끌고 왔는데 아버지는 큰집 사랑방에서 할머니께 이야기책을 읽어드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땔나무라도 해다 놓아야지 않겠냐고 말하면 화내고......"


"그렇게 손해 보면서 살았는데 왜 잘해주세요? 나 결혼 전에 언니들이랑 살 때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편지 썼다가 엄청 혼났었잖아, 왠지 알아? 편지 내용에 아버지 안부가 없어서야. 그 뒤로 엄마한테 편지 못썼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편지를 쓰다가 아버지 안부를 물어보려면 갑자기 그리움이 폭싹 주저앉아버렸거든, 엄마는 엄마보다 자식보다 아버지가 우선이고 아버지가 기준이세요, 우린 그게 섭섭해요, 엄마를 위해서 조금 이기적이셨으면 좋겠어."


부모님의 결혼 60주년 기념일에 아버지는 엄마에게 편지와 금일봉을 선물하셨단다. 두 분의 결혼생활이 벌써 60년이 된 것도 놀랍지만 아버지의 편지는 더더욱 놀랄 사건이었다.

기념일을 앞두고 아버지는 둘째 언니에게 전화를 하셨단다.


요즘 금값이 얼마냐?

갑자기 금값은 왜요?

엄마한테 선물 줄까 하고.

요즘 금값 비싸기도 하지만 엄마는 평생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하셨으니 엄마가 원하시는 편지를 써 주세요.

편지를 어찌 쓰냐?

그냥 진심을 전하시면 돼요.

그건 못하겠다.

그러지 말고 해 보세요. 솔직히 엄마한테 고마운 거 많잖아요. 이건 이래서 고맙고 저건 저래서 고맙고 생각나는 대로 쓰시면 돼요.

 

언니의 조언대로 편지를 쓰신 아버지와 그 편지를 받은 엄마의 기분이 어떠신지 궁금해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저 막내딸요, 뭐하셔요?

티브이 본다. 엄마 바꿔주랴?

네.

엄마는 뭐하세요?

아버지랑 놀고 있지, 육백 한다.

아버지는 티브이 본다고 하시던데 화투 하신다고?

그래.

결혼기념일 선물 받으셨어요? 엄마 좋겠네, 아버지가 편지다 뭐라 쓰셨는지 너무 궁금해요.

좋지, 뭔 말을 했는지 벌써 잊어버렸다, 궁금하면 와서 봐라.

흐흐흐 알겠어요, 다음에 가서 볼게요, 그리고 돈 많이 따세요.

그 돈이 그 돈인걸 따면 뭐하냐. 그래 끊자.

두 분이 화투를 하면서도 아버지는 티브를 본다고 하고 엄마는 아버지와 논다고 하신다. 엄마의 말에도 중심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했을까? 그동안 고생한 거 고맙다고 하셨을까? 아프고 무능한 당신 대신 경제적 책임을 진 것이 미안하다고 하셨을까? 엄마의 손해가 갚아질 만큼 진심을 담으셨을까? 아버지의 편지엔 어떤 애정의 말이 쓰여 있을까?


아버지의 편지로 떠들썩해진 자식들이 아버지께서 엄마께 선물해 주고 싶으셨던 금붙이를 준비해 조촐한 결혼 60주년 기념식을 해드리고 아버지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고 노래도 부르자는 계획을 잡았다.

편지 속에서 결혼 60년간 손해 본 엄마가 그리 억울하지 않을 이유도 찾고 아버지의 변명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 아버지 안부를 빼먹어 야단 맞았던 내 편지의 기억이 상쇄 되기를 기대하며 편지 낭송에 어울리는 멋진 배경음악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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