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엔 아들들에게 꽃바구니 선물을 받을 계획이야, 알았지?
넵! 용돈은 얼마를 넣을까요?
용돈은 됐고, 꽃만 있으면 돼.
웬 꽃?
둘째를 임신하고 정기검사를 받던 중 다운 증후군이 의심된다는 말을 들었었다. 재검을 받고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기간은 일주일!
그 사이에 결혼기념일이 있었다. 매일을 두려움으로 울며 기도하고 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내 나이와 같은 수만큼 장미꽃을 선물해 주었는데 그 시절 장미꽃은 엄청난 사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3월 14일은 우리나라에서 장미꽃이 제일 비싼 날이라고 했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엔 '화이트데이'는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결혼기념일은 모든 연인들의 기념일이 되었고 갑자기 장미꽃 값이 제일 비싼 날이 돼버린 것이다. 연애할 때도 받아보지 못했던 내 나이와 같은 수의 장미꽃 다발은 황홀했으나 그 화려함을 받고 화사하게 웃기엔 상황과 형편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비싼 걸 사 오면 어떡하냐고, 다음부터 꽃은 한 송이면 되고 나머지는 돈으로 달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 직전 그 상황이 아니었다면 난 굉장히 행복하게 꽃다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나이와 같은 수의 장미꽃 선물은 내 로망이었다. '화사한 홈드레스나 레이스 달린 앞치마를 입고 집에서 살림하는, 세상 물정은 제법 모르는 주부로 햇살이 따스한 거실에서 꽃을 화병에 꽂고 있는!' 결혼 전에 그런 상상을 했었다. 현실은 '작업복을 입고, 우사 청소를 하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 사료값에 떠는 가난한 목장의 안사람!'이고 태중 아가의 건강을 걱정하는 처지였다.
다행히 재검 결과지엔 다운 증후군 확률은 몇천 분의 1이라는 선명한 숫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건강한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그 후 IMF 외환위기 시대를 거치고 세둥이의 부모가 되고 엄청난 육아와 살림을 하느라 기념일에 꽃을 선물 받는 일은 어쩌다, 뜬금없는 일이 되었다가 아이들이 전화로 축하한다는 말을 해줘야 그제사 우리에게 기념할 만한 날이 있음을 상기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무덤덤한 척, 잊은 척 살던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직접 선물을 주문한 이유가 있다.
작년에 재수생이 둘이었다.
둘째는 취업재수생, 셋째는 수능 재수생.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겠다. 내 자식들에게 필요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한 지원을 해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감사하게도 두 아들 모두 무사히 재수를 마쳤다. 신이 나서 만세를 외치고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 좋아 춤을 추고 자다가도 웃음이 나온다.
신입생에게 옷과 신발 등을 사 주고 신입사원에게 옷을 사 입으라고 용돈을 보내주었다. 내게는 비싼 그 값들이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비싸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부모 된 우리도 참 수고 많았다는 칭찬이 담긴 선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주문한 것이 꽃바구니다.
사치스러워서 받고도 부담이 되었던 꽃,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넘기고 잊은 척 지냈던 기념일, 우리 부부가 직접 서로에게 선물을 할 수도 있지만 이번엔 자식들에게 선물을 받고 싶다. 엄마 아빠가 결혼해서 너희들이 태어난 거라는 너스레를 떨며 자식들 덕분에 '화려하고 낭만적인 꽃바구니' 앞에서 가볍고 화사하게 세상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려고 한다.
내일(3월 14일)이 기념일인데 꽃바구니는 하루 전인 오늘 큰아들이 들고 왔다.
건물에 거주 중인 학생 중에 오미크론 확진자가 발생해서 꽃은 배달시키고 아무도 오지말라 했건만 직접 가져다 드리고 축하도 해주고 싶어서 왔단다.
서로 마스크도 벗지 못한 채 인사만 나누고 가는 모습 보면서 괜히 꽃바구니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조금 후회도 했으나 아들의 수고 덕에 결혼 전 상상했던 '세상 물정 모르는 주부'의 꿈을 잠시 이룬 것 같아 빙긋이 철없는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