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오래 살면 닮아간다는데,
우리는 결혼하기 전부터 닮은 것 같았었다.
같은 말을 했다. 꿈꾸기를 좋아했다. 꽃밭을 가꾸고 싶어 했다.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다.
같은 말을 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 년 살고 싶네" 그러자고 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이들 낳고 오손도손 예쁘게 살자고 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 초원 위가 이상했다.
남편의 초원 위는 시골 마을이었다. 그림 같은 집은 작고 아담하고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집이었다. 나의 초원 위는 드넓은 우리 소유의 초원이고 언덕 입구에 대문이 있고 언덕 가장자리에 관광지의 사진이나 엽서에서 본듯한 그림 같은 집이었다. 뻔한 형편으로 남편의 초원 위가 현실적이기는 하였다.
꿈꾸기를 좋아했다.
남편에게 행복을 주는 꿈은 잠을 자야 꾸는 꿈이란다. 잠자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누누이 말한다. 나에게 행복을 주는 꿈은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결혼할 즈음에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의 한 대목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자는(원 가사에 없는 말을 넣어부름) 너를 볼 수 있다면"이라는 소절 중 '너'가 '나이길 바라는 꿈'이었다. 거의 매일 아침에 내가 먼저 일어나서는 "제발 일어나라"고 깨워야 눈을 뜨는 남편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며 "난 그렇게 살고 싶어" 투정하면 "알았어 당신도 더 자라 그러면 다 자고 일어나서 네 얼굴 보고 있을게" 그랬다. 남편은 주야장창 꿈을 꾸었다.
꽃밭을 가꾸었다.
남편은 화초를 좋아하고 나무를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한다. 화분에 흙을 채우고 화초를 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딴다. 아파트 발코니에 꽃밭을 만들고 원룸 옥상에도 꽃밭을 만들었다. 나는 유명한 드라마 대사 "내 꽃밭 망가졌다고 오빠 꽃밭 망가트릴 생각 없다"가 인상적이었다. '아 결혼은 꽃밭을 가꾸는 것이구나, 망가지지 않게 예쁘게 가꾸어야지' 했었다. 가정이 꽃밭이고 자식은 내가 보살피는 화초였다.
살다 보니 남편의 꽃밭에도 내 꽃밭에도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이웃의 아주머니가 찾아오셔서는 어려운 부탁이 있단다. 아이 학교에 화분을 가져가야 하는데 하나만 줄 수 있냐고 하셨다. 많으니 하나 드렸다. 퇴근 후 남편이 내가 이웃에게 준 화분은 친구에게 선물 받은 거고 분도 토분이라 귀한 건데 묻지도 않고 주어버렸다고 섭섭해했다. 그깟 화분 하나 별것도 아닌데 섭섭해한다고 내가 못마땅해했었다. 또 어느 날에 빨래를 들고 움직이다가 실수로 새로 나온 싹을 건드려 떨어트려버렸다. 솔직히 남편이 그렇다고 말을 할 때까지 알지도 못했다. 화는 내지 않았지만 두고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꽤나 속상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남편이 나와 상의 없이 동갑내기 여자에게 빚보증을 섰고 그 일로 우리 집이 가압류가 되었었다.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한 것도 화가 나지만 여자에게 보증을 섰다는 것은 내 신뢰를 저버린 일이라고, 내가 가꾸는 꽃밭을 망가트린 것이라고 화를 내며 따져 물었었다. 남편은 얼마 되지도 않고 별것도 아닌 일로 믿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더니 네 맘대로 하라면서 자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여러 달이 지나고 가압류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내 꽃밭은 태풍이 지나간 듯 엉망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꽃밭을 함부로 대하고는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했다.
함께 여행을 했다.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했다. 남편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였다. 나무를 보고 산을 보고 경치를 보다 아예 딴 길로 갔다가 되돌아와 다시 출발했다. 차멀미를 하는 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어 했다. 도착해서 땅을 밟고 계획된 여정을 진행하고 싶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고 도착할 때까지 그냥 자버렸다. 남편은 "마누라가 차만 타면 자버리니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운전하면서 딴짓 좀 하지 말라"고 말했다.
처음 연애하고 결혼하여 같은 말에 같은 생각인 줄 알았을 때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고 사랑하고 있어도 더 사랑하지 못해 아쉬웠다. 같은 말에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이가 멀어지며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고 분노했고 미워했다.
몇달전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말씀이,
마태복음 18장 21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였다. 말씀의 주제가 얼마큼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 번에 일곱 번씩이라도 하라"라고 답하셨다.
남편이 말했다 " 우리가 뭔가 오해를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용서할 것이 있는 줄 아는데, 그게 맞을까? 용서를 해 준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시 용서를 해 줄 대상보다 우위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닐까. 베드로의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는 질문은 "몇 번이나 용서를 받았을까요"라고 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말씀을 듣기 얼마 전에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그러니 먼저 사과해 달라고 내가 부탁을 했었다. 내감정을 이해하지 못한것 미안하고 함부로 행동한것 미안하고 더 책임지지 않은 것 미안하다고 말해 달라고 했었다. 남편의 사과를 받고 나도 함부로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사과를 먼저 받아야 응어리진 마음이 풀릴 것 같았었다.
어버이날 아버님을 찾아뵙지 못해 오늘에서야 다녀왔다. 남편은 시장에 들러 여러 가지 채소 모종을 사다 아버님댁 옆에 있는 당신의 꽃밭에 심었다. 옥수수 모종을 100개나 심었고, 참외를 심었다고 자랑을 한다. 옥수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먹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다.
찰옥수수모종
남편이 꽃밭에 두둑을 만들어 옥수수를 심었다.꽃밭에 심은 옥수수를 보며 생각한다. 내가 용서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 받으며 용납받으며 살아왔나 보다. 나는 질문을 다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