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비를 좋아했었다.
비 오는 날,
결혼 전에는 애인과 창이 큰 찻집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웃었고 그 애인과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후에는 파전을 부쳐 놓고 막걸리 한잔씩을 따른 후 마실 때마다 짠! 건배! 입은 입끼리 부딪치고 잔은 잔끼리 부딪치며 어지간히 친한 척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비 오는 것이 싫어진 시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더욱 싫어진 것은 확실하다. 비 오는 날 운전은 힘들었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놀아줄 남편이 없는 것도 싫었는데 일주일간 피곤으로 절여진 몸이 주말에 집으로 와서는 종일토록 잠만 자는 듯이 보여 섭섭했었다.
주말에 남편 오기를 기다리던 마음들이 점점 짜증으로 변하더니 비가와도 차 한잔이나 막걸리 한 사발을 찾지 않게 되었다.
여러 달 전 미장원에서 머리 염색을 하려고 기다리던 중에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과 원장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둘의 대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분은 남편분이랑 산책할 때 손을 잡고 다니는데 손을 잡으려는 그 순간이 설렌다고 말했고 원장님은 아직도 그게 가능하냐, 그럼 잠자리에서 키스를 하냐고 물었다. 그분은 뽀뽀는 하지만 젊어서처럼 키스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둘이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안들을 수가 없는 작은 공간이지만 무심한 척 여성잡지를 보고 있는 나를 원장님이 불렀다.
'언니, 언니는 키스해?'
방어할 태세를 갖추지 못한 채 질문을 받은 상황이라 '뽀뽀하지'라고 어색하게 대답했더니
"뽀뽀 말고 키스 말이야, 잠자리에서 키스하냐고" 다시 물었다.
이 나이에 감출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야기할 주제도 아닌 질문인지라 대답을 피하려니 이미 들어버린 말이 있어서 어색하게 "키스를 해야 잠자리도 하지 않나?"라고 남의 말을 하듯이 얼버무린 후 재빨리 여성잡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뒤에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더 했고, 또 나에게 뭐라고 물어온 게 있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뽀뽀하지"라는 대답 후에 뭔가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졌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맛있지? 맛있으면 뽀뽀! 를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쉽게 해댔었다. 별것이 없어도 뽀뽀! 요구를 남발했다. 남편과 손잡고 산책 다니는 것이 '설렌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늘 잡고 다녔다. 아무 때나 손잡고 뽀뽀하고 "사랑해" 소리를 쉽게 했었다.
그런데 남편 손을 잡고 다닌 기억이 끊겼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놓고 뽀뽀를 요구한 기억도 끊긴 지 오래되었다.
비가 오면 옷이 젖을까 밖에 나가는 것이 귀찮다.
거실 큰 유리창 밖의 비는 낭만이 아니라 습한 기운으로 몸을 쳐지게 하고 마음에도 짜증이 그득하게 한다.
장마가 시작되고 며칠 후,
"아! 진짜! 비가 너무 싫다."라고 말하니 남편은 "좋잖아. 비 오면 오는 대로 좋고 부침개 해서 막걸리 한잔 해도 좋고, 어째 낭만이 없어요." 한다.
"그러게요. 내가 어쩌다 낭만이 없어졌을까? 예전엔 비 오면 강아지 마냥 좋아했었는데 말이야, 당신이 고생시켜서 그런 것 같아"라고 대꾸했다.
"그런 거면 미안하네"한다. 갑자기 안 하던 말을 듣고 맘이 이상해졌다.
장마가 참으로 길었던 요즘이다. 어제 오래간만에 해가 떴다.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초록색 꽃기린 선인장 잎사귀 색깔이 옅어 보인다.
"어라 제네들 좀 봐, 밖은 장마로 여기저기 홍수가 났는데 화분 속에서 가뭄 들었나 봐"라고 말했더니
남편은"에어컨 바람을 많이 쏘이면 마를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거 같고 오랜만에 해가 났다고 그거 쳐다보느라 방향을 바꿨구먼" 하더니 씻으러 욕실로 가기에 나는 꽃기린 선인장을 살펴보았다.
정말 꽃봉오리가 창 밖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주방 방향에서 보면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바람에 자세를 구부리고 있다가 해가 나자 그것 보느라 몸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으려고 창에 붙어 꽃기린 얼굴을 자세히 보니 해님을 닮은 이쁜 얼굴로 방긋 웃는 것 같다.
남편의 "그럼 미안하네"란 말로 그리움의 근원을 조금 안 것 같다.
남편은 타 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내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것이고 상황이 그럴 수도 있었는데 오랜 시간 내 맘속에 비가 내렸다. 그래서 내 맘속 장마는 남편이 비를 계속 뿌렸기 때문이든지 비를 피할 지붕을 만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원망을 했었다.
그런데 "그럼 미안하네" 라니!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시점에 나온 그 말이 신기하게 들렸다. 장난이든 진심이든 남편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장마 후에 나온 해처럼 느껴졌다. 맘속 응어리가 물러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화분 속 꽃기린 선인장이 해를 쳐다보듯 그 말에 집중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오래도록 내 맘속에 있는 섭섭함을 없애줄 어떤 의식과 같은 말이다. 아마도 난 아무 때나 뽀뽀를 요구하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나 보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즐겁고 산책할 때 손잡고 다니던 그저 웃음이 많던 모든 순간이 행복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