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숙집 이모 Mar 07. 2020

씨된 말 열매 될 말

   예전 하숙생 훈이가 왔다.  

할머니는 욕을 하셨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어렸을 때부터 당돌했던 나는 "할머니 그러시면 안 돼요, 벌어먹을 년이~라고 욕하세요". 그럼 할머니는 저년이 말하는 것은 쓸만하네 라며 웃으셨다. "말이 씨가 된다 잖아요"라고 말씀드렸던 기억도 있다.


예전부터 말이 씨가 된다는 언사에 대한 주의를 가르친 것인데 오늘 나는 그에 반대되는 "말의 씨"에 대한 경험을 했다.


다음 주 먹거리 준비를 위해 식당서 일하다 잠시 쉬는데 누가 문을 열며 안녕하시냐 인사한다.  터벅거리며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벌떡 일어나서 손을 뻗었다.

"야아 아~ 세상에 반가워라. 훈아 얼마만이야" 속사포 마냥 쏟아낸 인사를 훈이는 쑥스러운 얼굴로 받아내고 서 있다.

"야아 아~ 어쩐 일이야, 학교에 일이 있었어? 여하튼 어서 앉아"

학교에 볼 일은 아니고 이 지역에 발령이 나서 일부러 들렸단다.


훈이는 조금 이상한 학생이었다. 늘 혼자 다녔다. 요즘은 혼자 다니는 학생들이 많기는 하나 대부분은 같은 과나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면 인사도 하고 동석도 하는데 훈이의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어쩌다 인사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아주 드물었다. 나이도 많은 형이니 따라붙는 동생들도 있으련마는 일반적이라 생각되는 형태의 경우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갔다. 깡마른 몸에 건강도 약해 보이고 먹성도 짧았다. 일부러 더 먹어라 뭐 좋아하냐 말을 걸어 보아도 별스런 대꾸가 없었다.  마음에 조금 어려운 분!이었다.


훈이의 첫 임용고시는 실패를 했다. 그래서 나름 위로를 했는데 반응이 남달랐다. 다른 학생들은 슬픈 표정이나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데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다행이다 싶어서 일반 회사에 취업을 하려면 재수 삼수 n수도 한다더라 다음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되지, 학교 올 일이 있으면 놀러 와서 밥 먹고 가고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자랑하러도 오라 말하며 헤어졌다.

그해 졸업식이 치러진 며칠 후 식사시간이 끝나갈 무렵 인사드리겠다며 찾아 왔다. 워낙이 반응이 없던 아이가 찾아오니 신기하고 반가워 억지로 앉혀서 밥을 먹게 하고는 와서 좋다고 그러니 또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역시나 별반응이 없이 헤어졌다. 그런데 일 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 왔다.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임용된 지역이 이 도시여서 왔단다. 오늘은 마주 앉아서 말도 많이 했다. 부모님 안부도 전해주고 이쁜 여동생 안부도 전해준다.

어디서 사냐,

원룸을 구했다,

다니는 길은 얼마나 걸리냐,

차가 없어 버스를 타는데 조금 많이 걸린다,

힘들겠다. 어서 차를 사라,

면허부터 따야 한다,

면허 따고 차를 사라 서울은 교통편이 좋아 차가 필요 없지만 시골에선 있어야 활동 영역이 넓어진다.

중고차를 운전하게 될 것이다,

괜찮다 그게 훌륭한 거다. 사치하면 안 된다.

차에 대하여 학교에 대하여 부모님과 동생에 대하여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대화라는 것을 했다. 일 년 밥 먹는 동안 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가 떨어져 잠시 멀뚱거렸더니 시계를 본다. 가야 하겠다며 일어선다. 나도 현관 밖까지 따라나선다.

손을 잡고 어깨를 안으며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놀러 오란 말 많이 한다. 놀러 오겠다는 약속도 많이 한다.  졸업식이나 여름방학이면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모두 바쁜 삶을 살다보니 오란 말이 빈 말이 되고 오겠다는 약속이 비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내가 한 말에 씨가 되어 놀러 온 훈이를 보니 마음이 벅차다.

마음도 몸도 더 건강해 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씨가 될 말을 또 했다. 

이제 운동을 좀 하면 좋겠다. 예전보다 얼굴이 멋있어졌다. 빛이 난다(정말 그랬다). 많이 걸어라 그러면 훨씬 더 건강해진다. 그리고 또 놀러 와라 사는 곳이 멀지 않다니 자주 와라. 이번엔 그러겠노라, 가끔 찾아오겠노라, 아저씨께도 안부 전해 달라 반응도 해준다. 그러니 욕심이 난다. 다음엔 말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당차고 더 건강해진 모습 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상가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