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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이모 Dec 23. 2020

사랑고백

작은어머니께 드리는

지난달 말 살고 있는 집의 매도 계약을 해 놓고 마음이 심난스러웠다.

이웃 도시들은 집값이 2배로 올랐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내가 사는 집은 9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어머니를 찾아뵙고 조언을 구했다.  


아이들은 장성해서 집으로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도 몇 년 후면 지금의 일을 그만 둘 예정이라 집 매도금으로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현재 현금화가 가능한 금액이 얼마인가를 물으셨고 나는 초라한 대답을 했다.

'둘째는 서울에 있고 막내도 서울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전세가 있는 아파트를 구입해 놓았다가 몇 년 후 일을 그만 두면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셨다.


서울!

인터넷을 통해 서울의 집값을 검색해 보았다. 전세를 안고 산다 하더라도 우리가 판 집 값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서울 생활은 직장생활과 신혼시절 잠깐 겪어 보았었다. 남편의 첫 퇴사가 없었다면 아마도 서울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선택의 순간들로 되돌아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고 선택의 다른 편에 있었던 놓친 그것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진 것이 부족하고 열심히 살아온 삶은 주변머리 없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도 못 자고 책도 못 읽고 멍청한 상태로 오그라든 자신을 향한 연민에 빠져 우울감만 깊어졌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란 사람은 우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것 저것 없어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오지 않았느냐고 긍정의 내가 나를 흔들었다. 그래서 20여 일간의 고민을 끝내고 새로운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 선택엔 작은어머님의 도움이 컸다.

"질부는 이제 쉰한 살. 아직 무리해도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도 된다."

그 말씀에 "네!"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유태인은 담이 높으면 먼저 자신의 모자를 담 저 편으로 던져 버린다'는 어딘가에서 얻어 들은 말을 기억해 냈다. 어쩔 수 없이 꼭 해야 할 상황으로 만드는 전략이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보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형편은 적당한 무리가 아니라 심하게 무리를 해도 서울 입성은 힘든 일이고 위험에 도전하기엔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겨우 몇 발짝 앞으로 걸어 중간지대로 갔다. 서울이 아니라 수도권에 집을 사놓기로 한 것이다.

조금 더 노력은 하되 무리하지 않고 담 안으로 가기 위해 먼저 사다리를 만들기로 했다.


마음으로 타협을 해 놓고 서울로 갈 형편이 안된다고, 무리할 수 없다고, 위험을 감수하기엔 두려움이 크다고 작은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통화를 마치고 실망하셨을까 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 작은어머님께톡 편지를 주셨다. 


"사랑하는 종손부에게!

경주 김 씨 상촌공파 집안으로 시집온 지 얼마 지나면 일세대가 다가오는데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고

얼마나 고민하고 밤잠 못 이루고 살아왔는지 눈에 선해요.

사랑하는 **씨만 있으면 인생이 푸른 하늘처럼 청량한 앞날에 탄탄대로만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한 결혼생활은 사내아이만 셋이고 남편은 경주 김 씨의 고집이 있고 시댁은 기댈 곳도 없고 오롯이 자력으로 버텨야 할 상황.  수고 진짜 많았군요~.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수고가 헛되지 않고 멋진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태*엄마, 바라만 봐도 가슴이 찡한 내 새끼. 조금 더 하면 눈물이 나요.

.......   내가 보고 있는 질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본인을 사랑하고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숙집 이모나 작가로서나 모습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예전엔 남편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시어머니께 고해드렸었다. 친정엄마는 내 투정을 받아주실 여력이 안되었고 나도 힘든 엄마께 내 걱정을 얹혀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님은 자식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궁금해하셨기 때문에 남편 흉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 "갸가 그럴라.", 아니면 "그놈이 나쁘네. 엄마가 혼내야겠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서 전혀 공정하지 않은 심판을 보시며 기분을 맞춰 주셨었다. 그렇게 다정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쓸쓸함이 있었다. 투정을 받아줄 엄마가 없는 허전함이었다.


그런데 집 구하는 문제로 조언을 구하겠다고  작은어머니께 전화를 걸어서는 집 이야기 말고도 남다른 고집을 자랑하는 김씨 남자 흉을 보고 속상하게 했던 일들을 고자질하며 응석을 부렸다. 역시나 작은어머니는 화끈하게 내편을 들어주셨다. 할아버지부터 고집은 대단했다고 아버지 작은아버지 모두 그렇다고 작은어머니도 속상한 일 많으셨다고 질부가 애쓴다고 고생했다고 내편을 들어주셨다. 중년의 나이로 철부지 같은 응석을 하는 나를 받아주시는 작은어머니의 반응 덕분에 엉겨 붙어 있던 허전함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편지로 전해 주신 "내 새끼!",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씀 속에서 따뜻한 어머님을 느끼게 하셨다.


편지를 받은 다음날 전화를 드려 서울로 입성은 못했지만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작은어머님이 지도해 주신 덕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편지 읽으며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랴, 나도 편지 쓰다가 눈물 나더라." 하셨다. 

그 말씀에 또 울컥해서,

"저 사랑받고 있어서 감사해요. 어머니 안 계셔서 허전했는데 작은어머님이 계셔서 너무 좋아요."라고 사랑고백을 했다. 


앞으로 더 자주 상의하고 지혜의 말씀을 듣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내고도 눈에서는 물기가 고인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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