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첩자를 찾아라!
장기간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순대국밥이 이제 곧 만원을 넘어가려 한다. 순대국밥이 만원이 넘어간다는 건 점심시간 직장인이 느끼는 배신감을 넘어 우리 생활 전반에 커다란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는 긴박한 재난 신호다.
회사 동료의 여자 친구분은 코로나 시기에 배달 제육덮밥 사업을 시작했다. 식용유 값이 두배로 뛰어 제육을 볶을 수가 없단다. 오랜만에 찾아간 단골집 메뉴판에 갑자기 테이프로 덧붙여진 낯선 숫자들을 이제는 마냥 괘씸하다 할 수가 없다.
변종 바이러스들로 현재와 미래가 불확실한 경기침체 상황에서 러시아의 침략 전쟁이 물가상승을 부추겨 일부 선진국들은 스태그플레이션 상황까지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건 상황이 진정된 뒤에도 다시 나아지지 않을 내 월급과 다시 낮아지지 않을 순대국밥 가격이다.
모든 유무형의 제품, 서비스는 그 양과 질에 따른 수요와 공급을 기준으로 시장가격이 형성된다. 어떤 서비스는 먼저 제품을 만들고 그에 맞는 가격을 책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격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게 서비스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사업의 특징에 따라 기업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가격정책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가격정책 변경 그 자체만으로도 사용자 경험이 크게 뒤바뀔 수 있다.
증정품이나 공짜가 아닌 이상 가격표/견적은 사용자가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톨게이트와 같다. 내가 매일 가는 목적지 주소는 변함이 없고 목적지의 모습도 예전과 그대로이지만 내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톨게이트의 요금이 올랐다면 내 눈썹도 치켜 올라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가격정책은 그 존재 자체로 사용자 경험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는 가격정책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에겐 사용자가 최우선이다. 때문에 마치 경험 디자이너들이 사용자의 편에 서서 가격 인상 정책과 싸우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가격 인상에 따른 사용자 불만을 최소로 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사용자를 기만해야 할때가 있다. 처음부터 누구나 인정하는 합리적인 수준의 가격 인상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대부분은 인상된 가격에 대해 제품과 사용자 양측 모두가 납득하기는 쉽지 않다.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는 기업에게 가격 인상의 부당함을 역설할 수도 없고 사용자에게 무조건 이해를 바란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 물가상승에 맞서는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의 최선은 결국 이중첩자가 되는 것. 회사의 가격정책을 수용하는 동시에 사용자들이 일방적인 가격 인상을 크게 체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가격정책 변화에 따라 예상되는 사용자 반응을 면밀히 분석한다면 바뀐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사용자가 불만을 느끼는 지점들을 최소화할 수 있다.
결국 순대국밥을 만원으로 올리는 순간 순대국밥집의 경험디자이너는 이중첩자가 되어 고독한 싸움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배신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중첩자 디자이너의 전략은 무엇일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기존 가격표를 새로운 가격표로 전면 교체해야 한다. 어설프게 기존 메뉴판에 빨간 줄 긋고 새 가격을 써놓거나 종이를 덧대 숫자를 바꾼다거나 하면 처음 온 손님이라도 가격이 올랐다는 걸 알아채버린다. 최대한 깔끔하고 티 안 나게 메뉴판의 가격 표기를 변경한다. 적어도 첫 방문 손님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특히 피해야 할 상황은 일부만 가격표를 교체하고 한두 군데는 실수로 인상 전 가격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다. 만약 사용자가 이전 가격을 보고 서비스를 구매하려 했는데 갑자기 인상된 가격을 고지하면 사용자는 기분이 몇 배로 상하면서 사용자가 싸움의 주도권을 가져가게 된다.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지고 들어가게 되는 꼴이다. 그러니 준비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현 시국을 강조하며 국밥집도 어쩔 수 없었다는 여론을 형성한다. 가격 상승에 대한 안타까움을 정성껏 작성한 삐ㄹ, 아니 종이를 식당 곳곳에 붙여놓아 손님의 적대심을 무너뜨린다. 특히 여론 형성을 위해서는 가격 인상에 대한 사전 공지가 필요하다. 이런 심리전은 SNS를 시작으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전개 가능하다. 사용자가 불편함을 느껴도 그래 뭐 어쩔 수 없었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면 작전 성공. 일단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손자병법의 허실 편에 싸우는 곳을 적이 알 수 없게 하라는 말이 있다. 시선을 분산시켜 허점을 노리는 전략이다. 있으나 마나 한 서비스를 이것저것 늘려 순대국밥집 손님의 혼을 빼놓는 방법은 어떨까. 공깃밥을 갑자기 하나 더 가져다준다거나 집에서 싸온 호박전 같은걸 툭 던져주는 식이다. 혹은 아예 메인 메뉴를 세트 메뉴로 묶어버려 어떤 가격이 어떻게 오른 건지 의심조차 어렵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삼국지를 보면 오합지졸 군대가 요란하게 징을 치면서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매달아 날뛰게 하여 흙먼지를 일으키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 너네 생각보다 머릿수 많다?라고 상대편 장수를 속이는 것이다. 그 허세가 통한다면 십만 대군은 겁을 먹고 군사를 물린다. 오합지졸 군대는 피 한 방울 없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국밥집의 경험 디자이너는 순대국밥 용기를 바꾸기로 한다. 조금 담아도 많이 담은 것처럼 보이는 얕지만 넓은 그릇이나 깊고 좁은 그릇으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
어차피 이미 오른 가격이라면, 아예 큰 폭으로 가격을 인상하여 프리미엄 국밥 세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프리미엄을 붙여 비싼 가격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대부분의 중소 기업에선 제품 가격 결정시 사용자를 생각하는 경험디자이너들의 의견이 배제되는 일이 많다. 대신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들이 가격 인상에 따른 고객 이탈방지 뒷수습을 떠안게 된다. 그럼에도 주어진 상황에서 사용자의 행복이 최대화 되도록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중첩자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국밥집 경험 디자이너는 손님들과 식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눈치 싸움에 승리했을까?
국밥집 경험 디자이너의 기만전술이 가격 인상에 따른 손님들의 부정적 감정을 최소화 했다면 유의미한 승리를 얻었다 할 수 있겠다. 만약 여러분이 단골 식당의 인상된 가격을 알고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면 이중첩자 경험 디자이너의 숨겨진 노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제품과 서비스들이 어느날 인상된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 양과 질로 나를 기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축하한다! 당신은 몰래 눈치보던 경험 디자이너, 이중첩자를 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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