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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 이옥봉의 '몽혼"

고전시가 노래로 읽

고전시가 노래로 엮어 읽기
님을 향한 사랑과 매력적인 시문, 그녀의 선택은?
고전시가는 옛날 노래다. 노래는 창작자의 스토리텔링을 비유와 상징 등의 표현 방식을 통해 시적 화자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한시의 해독은 독자의 배경 지식과 공감 능력에 따라 확장과 심화가 가능해진다.
남녀간의 이별과 사랑의 정한을 노래한 한시의 감상의 영역은 알파와 오메가, 즉 무한대다.
음식점에 가면 세균 담뿍 배양한 물티슈나 유한락스에 푹 절군 물수건 대신 위생적인 펄프지로 땡땡하게 뭉친 휴지 덩어리를 볼 수 있다.
접시 위에 달랑 한 개 놓인 새하얀 펄프지에 물을 부으면 부우욱 솟아 오르는 물티슈 덩어리.
난 한시 감상을 물 한방울만 닿아도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드는 펄프 덩어리같다고 생각한다.
17살 첫 만남에 화답시를 주고 받으며, 사랑에 빠진 유부남 조원의 첩이 되기 위해, 시를 버리고 거문고 현을 끊은 조선시대 여류시인 이옥봉.
그녀의 한시를 읽다 보면(여기서 읽다는 해독된 우리말 가사를 읽는다임)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포기한 설레임과 가슴이 아린 슬픔을 반추하게 된다.
24살 좋아하던 4살 연상의 잡지사 선배에게 고백을 받던 날, 2달 뒤에 부모님들간에 정혼한 약혼녀와 결혼식을 치르러 캐나다를 가게 됐다는 고백도 동시에 들었다. 내 설익은 첫사랑 남자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산다는 것과 02에 560으로 시작되는 전화 번호 외엔 아는 것이 없는데, 1987년 난 압구정동이란 이정표만 스쳐가도 주저앉아 울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전화번호를 꼭꼭 누르다 벨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 수화기를 내려 놓고 "여보세요?" 소리에 혹시라도 그 남자 목소리를 들을까 하는 기대에 난 미친 년처럼 연결되길 바라지 못하는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어쩌면 난, 내가 보낸 신호음이 그 남자의 현관 입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 같다.
그 때 자주 듣던 노래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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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중략---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이선희 ‘알고 싶어요’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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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연인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연락조차 못하는 여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는 이 노래 가사와 이옥봉의 한시 ‘몽혼’은 닮아 있다. 이선희도 안타까운 사랑의 정회를 노래하고 이옥봉도 자신을 버린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다.
고등학생들에게 고전시가를 가르치면서 두려운 장르가 한문으로 쓴 한시다. 한자를 외우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던 나는 한자가 섞인 일본어나 중국어를 지금까지도 배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자성어야 무작정 외우면 되지만, 압운을 맞춰 짓고 파자를 규칙적으로 배열해 의미 단락을 나눠 해석하는 한시는 기피 장르 중에 으뜸이다
그러나 한시를 스토리를 품은 옛노래로 역사적인 히스토리와 엮어 읽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안타까운 건 한자로 쓰인 한시는 번안한 글로 배워 운율을 느낄 수 없지만 시적 화자의 정서나 태도, 표현된 이미지만으로도 엄청난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사교육 37년 국어 교사인 나는 자습서나 문제집에서 주목하지 않는 고전시가 장르 중 ‘한시’를 학생들이나 한 때 고전시가를 배운 일반인에게 스토리를 지닌 노래로 전달하고 싶다.
여전히 한시 독해는 ‘인디애나존스’란 영화에 나오는 피라미드 상형문자만큼 부담스럽다.
근데 나이를 먹으니까, 한시가 끌린다.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인 가객들이 살다가 흔적을 추적해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이해하는 한시 이해는 고전시가가 원래는 노래라는 점에 착안하면 악보가 없어도 리듬을 즐길 수 있다.
“내 꿈 꿔!” 소시적 연애를 하면서 연인에게 유선 전화로 훅 던지던 미끼 문장처럼 한시 속의 시적 화자들은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이별의 정한을 ‘꿈으로라도 널 그린다,’라고 간절히 꿈을 빌어 읍소한다.
나 역시 첫사랑 남자와 헤어진 후, 아주 오래 동안 꿈 속에서라고 그 남자를 만나길 애타게 기원했다. 지금은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23살의 추억 속의 청년을 ‘몽혼’이란 이별시를 통해 보고 싶다 생각했다.
이별의 감정을 노래한 여류 시인 중 대표적인 기녀 계랑(이매창)은 당나라풍의 한시를 잘 짓는 풍류남 유희경과 사랑을 하고 헤어진 시조를 짓는다. 쓴 시조를 봐도 꿈에서라도 님을 만나고 싶은 애절함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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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花雨(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離別(이별)한 임
秋風落葉(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千里(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계랑의 시조----
계랑은 부안(扶安) 명기로 스스로 호를 매창(梅窓)이라고 했다. 그는 전라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시와 노래, 거문고에 두루 능했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묵재(黙齋) 이귀(李貴, 1557~1633)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 중 특히 유희경과 친하게 지내 두 사람간의 애정을 읊은 한시가 다수 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얀 배꽃이 비처럼 흩날리던 봄 날 임과 이별했는데 낙엽 지는 가을이 왔다. 그녀가 유희경을 오랜 시간 그리워하는 것처럼 임도 나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애가 탄다. 그럼 한양에 있는 유희경을 찾아가 만나면 되는 거 아닐까? 그건 안 되는 일이고 이루어져도 안 되는 일이다. 기녀는 사회적 공물(公物)이기에 한 명의 임을 온전히 차지할 수 없다. 더구나 자신이 소속한 관할 지역을 벗어나면 도망친 노비의 처지로 추노의 대상이 된다.
이런 자신의 비애를 알기에 계랑은 임을 만나기 위해 꿈길을 오고 간다 라고 노래한다.
시인이었으되 아내로 살기를 강요당했던 여인 이옥봉은 ‘몽혼’이란 한시에서 이렇게 묻는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 당신은 내 생각 안 하우? 나는 미칠 거 같은데.......​
기녀 시인 계랑처럼 나 역시 첫사랑이 오래도록 그리워했다. 두 달 뒤, 그가 캐나다로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난 파란 하늘에 떠가는 대한항공 태극 무늬만 봐도 목이 메였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왜 미리 나에게 좋아하고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았는지. 떠나기 전 친한 동생 편에 그 남자가 쓴 쪽지를 받았다. '다음에 다음에는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절대 떠나 보내지 말라고...'
30년 만에 그 남자가 떠오르는 이옥봉의 한시 한 구절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란 한 행이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란 노래 가사와 연결되어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해져 좋았다.
시문을 다 버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 살던 옥봉은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처럼 꼭 필요한 순간에 그녀의 재주를 공적으로 유용하게 쓰고, 조원에게 버림을 받는다.
조선 선조 때 사람 이옥봉은 시(詩)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러나 고위 관리였던 그녀의 남편 조원은 아내 이옥봉이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 시를 쓰는 대신, 평범한 당시의 여자들처럼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기를 원했다. 결혼 서약서에 다시는 시 따위는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기까지 하며, 머문 사랑하는 남자의 품은 그녀의 시혼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인 듯.
아내 옥봉은 ‘거울’을 보며 꾸미기보다는 붓을 잡고 시를 썼다. 결국 남편 조원(조선의 일상)과 아내 이옥봉(일상을 벗어난 시인)은 불화했고, 결국 이옥봉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사랑과 시,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옥봉.
현실은 그녀에게 시를 쓰는 아녀자로 살기를 강요했다. 조원은 아내의 목소리가 문지방을 넘고 담을 넘어, 저자 거리로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가 선비들 사이에서 읊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시가 중국에 전해진 것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희일(趙希逸)은 조원(趙瑗)의 아들이다. 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보고 "조원을 아느냐?"고 대신이 물었다. 부친이라고 하자 명 대신은 서가에서 시집 한 권을 보여주었다. '이옥봉 시집'이었다.
그럼 그녀는 왜 남편에게 내쳐서 남편의 집 앞 자갈밭이 모래가 되도록 꿈 속에 찾아 갔을까?
그녀가 조원에게 버림 받고 꿈길을 울며 오고간 건 그녀의 선을 넘는 오지랍 때문이다. 그녀가 측은지심으로 쓴 시 한편으로 불행한 '필화사건'이 일어나게 된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집 아낙네가 옥봉을 찾아와 산지기인 남편이 소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잡혀갔는데, 조원이 편지 한 장 써 주면 풀려날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한다. 옥봉은 글을 몰라 청원을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시 한 수 지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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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 삼아 쓰옵니다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닐진대
어찌 낭군께서 견우가 되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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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기 남편이 소를 훔쳤다는 이야기가 말도 안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한 편의 한시가 그녀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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