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울타리 너머> 글/그림 마리아 굴레메토바/ 북극곰
이서
북극곰 출판사의 <울타리 너머>를 처음 본 순간 평화롭고 쓸쓸한 동유럽의 초록 들판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파스텔톤에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채운 이 그림책은 소장하고 싶은 한 폭의 명화다.
미술관을 둘러 보다가 발길이 머무는 풍경화처럼 <울타리 너머>란 그림책에 앞표지와 뒤표지에 초록 들판은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울타리 너머 목책을 바라보는 아기 돼지의 서러운 뒤태에서 마흔 살 즈음에 고단한 내 모습이 겹쳐서 눈물이 났다.
이 그림책의 표지 그림을 본 나의 느낌을 형용사로 표현한다면 ‘무연함’이다. 여기서 무연하다는 "아득하고 너르다"란 형용사다. 아득하고 너른 초록 들판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는 아기 돼지를 보며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그림책 책 읽기를 멈췄다. 어쩌면 난 그 순간 표지 그림에서 떠오르는 나의 내면에 막막한 어제를 직면하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림책 읽기를 멈춘 날 밤, 난 꿈 속에서 39살의 유치원생을 둔 중년의 나를 만났다. 전업주부와 학원강사를 겸하며, 바삐 살아가며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하던 중년에 나를 만났는데 난 외면했다.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로 지친 내 얼굴을 마주보고 싶다 않았다. 꿈 속에 나는 무연히 너른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아기 돼지였다. 하염없이 울타리 너머를 목을 빼고 바라보면서도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앉아 있던 아기 돼지 ‘소소’였다.
"엄마 이제 죽어야지 눈 꼭 감고!" 7살 딸아이는 인형 놀이를 하자며 나에게 요술 공주 가발을 씌우고, 독 사과를 먹고 죽는 흉내를 내라 한다. 눈을 감고 꼴까닥 하고 있는데, 얼굴에 케찹을 짜서 피 분장을 해준다. 나는 차갑고 축축한 케찹에 촉감이 죽기보다 싫은데, 침까지 흘리며 꺄르르 웃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자 슬픈데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이를 따라 행복한 척 웃었다.
40살을 넘기던 어느 가을 찻집 테라스에 앉아 눈이 시리게 시퍼런 하늘을 보며 나는 그 파란 하늘에 풍덩 몸을 던져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 애살스런 딸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울타리 너머 나 혼자만으로도 족히 행복한 시간이 숨겨져 있을 거 같았지만 발목을 접어 앉히고 하루 하루를 살아냈다. 엄마라는 이름과 아내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 꿈 꿔 왔던 수많은 이름들을 뒤로 한 채.
일주일 뒤 그래도 결말은 해피앤딩이겠지 하는 마음에 <울타리 너머>란 그림책을 다시 읽었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 에필로그격인 속지를 보니,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울타리 너머를 망연히 바라보던 아기돼지가 옷을 벗어던지고 갈색털이 무성한 야생돼지와 숲속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엄청 신바람나게 울타리 목책을 벗어난 아기 돼지 ‘소소’는 야생 멧돼지 ‘산들이’를 만나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안다’에게 안녕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꽁지가 빠져라 숲으로 달려 가는 그림을 보며 셀레이고 기뻤다. 마치 내가 아기 돼지 ‘소소’가 되어 엄마라는 옷과 아내라는 이름을 벗어 던지고 자유롭게 내일을 향해 달려 가는 거 같았다.
나는 이 그림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았다. 이름이 '안다'인 남자 아이는 놀이 친구인 ‘소소'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배려심이 없는 ‘안다’는 사람 옷을 아기 돼지 ‘소소’에게 제 멋대로 옷을 입히고, ‘소소’를 귀찮게 한다. ‘안다’와 함께 하는 시간은 소소에게 불편하고 지루하다.
남자아이의 이름 '안다'를 나는 영어 'know'로 아기 돼지 '소소'는 영어로 "그저 그렇다"에 'so-so'로 해석해 읽어 보았다. ‘소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안다’와의 삶은 아기 돼지 ‘소소’에게 그저 그런 시간이었던 거 같다.
내 나이 40살에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은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그랬던 거 같다. 나 자신의 욕구보다는 가족들의 기쁨을 위해 희생하고 살면서,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작가가 되고 싶던 꿈도 포기하고. 그런데 이만하면 행복하다며 가족이란 울타리에 나를 가두고 살던 나의 마음 한 켠을 늘 허전했던 거 같다.
<울타리 너머>에 일러스트 중에 내 마음이 머문 페이지가 있다. 거대한 저택의 고급진 방에 창문 앞, 엔틱 의자에 아기 돼지가 기대 앉아 하염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 때는 그랬다. 가정을 벗어나 나 자신을 개발하는 게 사치인 듯도 싶었다. 늦둥이 딸을 낳고 우연한 기회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게 되었다. 나는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확인 한 이후, 나는 입시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치던 나의 전공을 살려 지금은 독서 교육 전문가로 독서 토론 프로그램을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다행히도 남편과 아이들이 엄마의 늦깍이 공부를 응원해 주었고, 늦둥이 딸도 도우미 이모가 잘 케어해줘서 건강하게 잘 자랐다. 처음엔 3살밖에 안 된 아이를 남에 손에 맡기는 상황이 편하지 않았다. 낯가림이 심한 남편의 저녁 밥을 도우미 이모가 차려 주는 것도 미안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면 조금은 포기해야 한다. 39살 어느 가을날 가벼운 우울증을 겪은 나는 이제 새파란 가을 하늘을 봐도 슬프지 않다. 아이들은 엄마를 일부 세상에 나눠주고 남편은 절반의 아내의 사회적 이름을 흔쾌히 지지하며 불편함을 감수했다. 내가 행복해야 가족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림책 한 권으로 되돌아 본 나의 어제와 오늘. 이 그림책을 보고 울고 웃으면서 그림책을 쓴 쓴 마리아 굴레메토바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도전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던 아기 돼지 ‘소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익숙함을 버린다는 것은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고 어쩌면 울타리 너머 세상이 지금 이곳보다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편한 옷을 벗어 던지고 들판을 신나게 달리는 기쁨을 맛보려는 시도 그것이 울타리를 뛰어 넘어 ‘산들이’와 신이 나서 달리는 에너지다.
세상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오래 도록 마음에 머무는 표지와 샛노란 들판을 달리는 아기 돼지 ‘소소’가 ‘산들이’와 함께 힘차게 숲으로 달리는 마지막 장면을 정말 멋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