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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그리는  서정시

20년 만에 다시 읽은 그림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숀텐<빨간 나무>                

                                                   그림책 평론가 ‘이서’                    

숀텐의 <빨간 나무>을 처음 볼 땐 이쁘지 않은 그림이 불편했지만 강렬하고 따스한 빨간나무 그림은 너무나 좋았다.  이 책은 우리 딸이  굉장히 좋아한다.  그로테스크한 도시의 풍경 속에 괴물 같은 물고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 책을 5살 딸에게 읽어 주면서 아이의 동심이 파괴될 것 같은 그림을 빛의 속도로 재빨리 넘겼다. 그런데 아이는 넘겨던 그림을 다시 펼치고 거대하고 미련해 보이는 회갈색 물고기가 눈물 흘리는 장면을 뚫어져라 바라다 본다.  

“그림이 좀 무섭지?” 아이의 표정을 살피며 물어 보았다. 

“불쌍해!”

“누가? 불쌍한데, 소녀가?” 

“아니 물고기가”

“왜?”

“몰라, 엄마, 나 이 물고기 집에 데려 오게 아주 큰 어항 사줘!”

이상하고 이상했다. 안 그래도 불편한데 우리 집에 그림책 속 물고기를 담을 어항을 사 달라는 아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이의 <빨간 나무> 그림책 사랑은 마지막 장면에서 팡파레를 울린다.  방안 가득 노을빛 주홍으로 방을 밝히는 커다란 단풍나무를 보고 아이가 “아, 이쁘다. 엄마, 나도 이 나무 사줘요!”했다. 

나는 우리 거실을 꽉 채울 어항 대신에 빨간 나무 만들기로 아이의 욕망을 돌렸다.  마침 가을이라 집 앞 공원에서 빨간 단풍잎을 한가득 주워 왔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베란다 창 가득 ‘빨간 나무’를 만들었다. 

O헨리의 단편 소설의 <마지막 잎새>에 늙은 화가 아저씨처럼 그릴 수는 없으니, 스카치테이프로 빨간 단풍잎을 하나씩 붙였다. 일주일 뒤 바삭하게 마른 단풍잎이 하나씩 부서져 떨어질 때마다 아이는 울었고 그 자리에 싱싱한 단풍잎을 새로 채워 붙이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이 책을 더 싫어하게 만드는 거 같다.      

 큰 딸이 5살 때 함께 읽던 숀텐의 그림책 <빨간 나무>를 아이가 27살이 된 오늘 다시 읽는데 느낌이 새로웠다. 그 당시 내가 제일 불편해하는 장면이 있었다.  보라색 피에로 옷을 입고 “너는 누구니?”라고 쓰인 주머니를 목에 맨 소녀가 오른손에 인형을 들고 울고 있는 장면이다. 정방형의 무대 위에 기괴한 소품들과 얼굴에 종이봉투를 쓰고 트럼펫을 부는 남자가 있다. 무대 바닥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초록색 외계인 분장을 한 배우의 무서운 텅빈 눈이 공포스럽게 느껴지면서 마치 그 무대 위에 선 소녀가 나 같았다. 

 그 당시 아이가 좋아하는 이 장면이 는 상당히 불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소녀의 우울한 표정에서 8살에 나를 본 거 같다.  아빠가 수원에서 가내 수공업으로 하던 편물공장이 잘 안 돼 엄마와 아빠는 동생 둘을 데리고 서울로 가 버렸다.  1학년 입학식이 며칠 안 남은 나는 입학식을 해야 서울 학교로 전학시킬 수 있다고 달래며 일흔두 살의 할머니 곁에 두고 갔다.

 나는 수원 도청 근처 매산국민학교에서 1학년이 되었다. 당시 전 국민 스마일 운동이 국가 지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난 웃을 일도 없는데 샛노랗고 동전만한 스마일 뺏지를 달고 학교에 다녔다. 한 달에 한 두 번 엄마가 내각 좋아하는 소시지 김밥을 싸 가지고 수원에 내려 왔다. 

 지하철이 다니긴 전이라 나는 일요일 오전이면 수원역 역사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삐삐도 전화기도 없는 70년대. 

<빨간나무>의 소녀처럼 나는 거대한 암모나이트 같은 대합실 역사 나무 벤치에 네모란 란도셀을 매고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커다란 쾌종 시계가 “땡댕땡”3번 울리고 7번을 울릴 때쯤 할머니가 미련을 못 버리고 칭얼대는 내 등짝을 때리고 집으로 끌고 가셨다, 

 그런 날이면 동생들만 데리고 서울로 간 엄마, 아빠가 미워 울다가 잠이 들었다. 엄마가 내 손을 놓고 가던 날의 아픈 풍경 뒤론 항상 귀신처럼 줄기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그림자가 내 눈 가득 차올랐다.      숀텐의 그림책에서 갈색단풍잎이 소녀의 방을 가득 채우는 장면이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8살 기억의 풍경 속으로 제멋대로 걸어 들어 왔다.

 가는 귀 먹은 일흔두 살의 할머니는 가끔씩 밤마실을 가고, 빈집에 혼자 남은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베개 인형에게 말을 걸고 인형이 되어 말을 되돌리며 복화술을 했다. 그러다가 혹시 엄마가 나를 잊은 건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손때 묻은 베게 인형의 손가락을 쑤셔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좁쌀을 우악스럽게 끄집어냈다. 

  그때 내가 망가뜨린 베개인형이 이 책의 소녀는 자기와 가진 자신과 똑 닮은 복화술인형인 거 같다.  ‘말 소리를 던지는 인형’라 불리는 복화술 인형을 장갑처럼 손에 낀 소녀의 앞가슴에 매달린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인 주머니는 50대 후반의 나의 목에도 걸려 있는 듯하다.

  낯설고 거대한 도시의 콘테이너 벨트 속에서 불안과 우울로 얼룩진 하루를 시작하는 입이 안 그려진 소녀는 어쩌면  이민자로 가득한 호주의 항구도시에서 태어난 중국계 말레이시아 이민 2세인 숀텐의 어제의 풍경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만 두고 서울로 떠난 가족들에게 서운하고 원망스런 1학년 내가 숀텐이 불안과 우울로 얼룩진 하루의 끝, 방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어도 소리를 잘 못 듣은 할머니가 등들리고 누워 잔기침을 하는 깊은 밤 작은 방엔 달빛마저 새어들지 않았다.  

 3달 뒤 엄마를 따라 서울집으로 갔을 때 좋은 기억은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형광등이 달리 내 방이었다. 숀텐의 <빨간 나무>는 내 방에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었다. 형광등 불빛은 새로 산 빨간 원피스를 더 이쁜 빨강으로 보이게 했고, 가방에 늘 매고 다니던 샛노란 스마일 배지도 더 노랗게 웃고 있었다.

나의 빨간나무는 서울집 내 방에 형광등인 거 같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쉬지 않고 이바구를 했고, 엄마 아빠 두 동생은  별 것도 아닌데 함께 웃어 주었다.

나는 이 그림책에서 소녀가 커다란 가로등처럼 우뚝 서 있는 빨간나무를 올려다 보며 방긋 웃는 장면이 제일 좋다.  따뜻한 빨강과 연두빛 노랑빛이 한가득 방안을 비출 때 소녀는 스마일 뱃지의 캐릭터처럼 방긋 웃는다.

  큰 딸이 5살 때 읽은 그림책을 22년만에 다시 읽으며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났다. 그리고 50대 중반의 삶을 되돌아 보며 다가올 내일을 기다리는 나도 만난다. 지금은 복화술을 하며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좋아하는 그림책이 있으니.

 빨간 나무가 소담스럽게 피어나 있는 <빨간 나무> 그림을 통해서 전하는 위로의 서정시 숀텐의 <빨간 나무>, 이 그림책은  삶에 지친 이들을 일상에 위로가 되는 작품이다. 특히 빨간나무를 그림은   반짝이는 빨강 불빛에 금가루를  한 움큼 쏟아부은 듯 환상적이다. 

읽은 그림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인상적인 장면을 만나면 나의 심장이 스스로 말을 건네온다 나에게 이 그림책에 어떤 장면의 너에게 말을 걸어 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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