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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시조

 조선의 싱어송라이터- 조선시대 아줌마들     


며느라기 미워 시궁창에 뒹굴던 할머니     

사설시조 <싀어머니 며느리 나빠>          

  할머니는 27살에 청상과부로 6자식을 홀로 키우셨다. 2남 4녀에 장남인 아버지는 할머니에게는 아들이면서 남편같은 존재였다. 20살에 시집온 울 엄마는 코흘리개 삼촌과 4명의 고모들 뒤바라지로 신혼을 보냈다고 한다. 

 아들 가진 유세였을까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자란 엄마는 변변한 혼수도 못해 와서 할머니의 미움을 받았다. 철없는 시누이들도 만만찮게 엄마를 힘들게 했다. 책임감 강하고 인정많은 엄마는 시댁 식구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나를 고집이 있어 순종적인 맏며느리는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 흉을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와 할머니 뒷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엄마 사이에서 많이 귀찮았다.

 작자 미상에 사설시조 <싀어머니 며느리 나빠>란 노래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싀어마님 며느라기 낫바 벽 바흘 구르지 마오” 라고  읍소하는 며느리의 노래에 울컥하고 옛날 생각이 나서 숨이 안 쉬어졌다. 우리 할머니만 성질이 나면 흙바닥을 간질 환자처럼 뒹굴며 거품을 물고 엄며느리 욕을 하는 줄 알았는데.....

며느리 맘에 안 든다고 부엌 바닥을 뒹굴며 포악을 떠는 시어머니가 바로 나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뭐든 성에 안 차면 저고리 옷섶을 풀어 헤치고 마당에서 뒹굴다가 죽어 버린다고 집 앞 개천에 몸을 던졌다. 

 할머니는 “억울해 못 산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요사스런 며늘년이 들어와 내아들을 망쳐놨다!”고 악을 쓰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5살 때였던 거 같다. 하루는 막내 고모가 미군한테 시집 가려면 쌍꺼플 수술을 해야 한다며, 돈을 달라고 했다. 아빠가 돈을 안 주자 고모는 쥐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척했다. 하이타이를 푼 물을 먹고 간신히 살아난 고모를 안고 울던 할머니는 죄없는 엄마 머리채를 잡았다. 돈 내어 놓으라고, 아빠가 할머니를 떼어내려다 실수로 할머니가 대청 마루에 벌러덩 자빠지고, 눈이 뒤집힌 할머니는 한달음에 달려가 ‘풍덩’하고 집 앞 실개천에 빠져서 뒹구셨다.

할머니가 패악을 부릴 때마다 엄마는 어머니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할머니는 77살에 치매에 걸려 10년 가까이 어머니를 힘들게 하다가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할머니는 분노 조절 장애가 있지 않았나 싶다. 난 매번 고모나 할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싀어머니 며느리 나빠>란 사설 시조를 가르치면 늘 화가 난다. 

옛날에는 가난한 집 딸이 빚에 팔려가 민며느리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집안에 며느리는 합법적인 가족이기 이전에 아이를 낳는 씨받이나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설 시조의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부당한 갑질에 이렇게 따진다. 

“빚 대신으로 받은 며느리인가, 물건값으로 대신 받아온 며느리인가. 밤나무 썩은 등걸에 난 회초리와 같이 매서운 시아버님, 햇볕에 쬔 쇠똥같이 말라빠지신 시어머님, 삼 년 묵은 헌 망태기를 뚫고 나온 새 송곳 부리같이 뾰족하신 시누이님, 좋은 곡식을 심은 밭에 돌피(나쁜 품질의 곡식)가 난 것같이 샛노란 외꽃 같은 피똥이나 누는 아들(어리고 허접같은 남편을 이름) 하나 두고,


 기름진 밭에 메꽃 같은 며느리를 두고 어디가 나빠 그 요란을 떠시는고.”     

-사설시조 <싀어머니 며늘아기 나빠> 출전 <병가가곡집>     

이 작품은 고된 시집살이로 인한 힘겨움을 하소연하고, 이런 상황을 만드는 시댁 식구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시집 살이의 힘겨움을 토로하는 작품류를 '원부가'라고 한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남편을 방패 삼아 시집 살이를 하기엔 남편이란 작자는 샛노란 오이꽃같은 피똥을 싸는 병약하고 유약한 몸을 가진 사람이다. 게다가 소심한 효자 코스프레로 툭하면 부엌 바닥을 뒹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약한 시어머니를 달래지도 못한다.  

 이런 고약한 시집살이의 역사는 그닥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고려 때는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 결혼 생활을 하는 “시집가다.”가 아닌 남자가 장모님댁으로 옮겨 가 사는 “장가가다”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 중에 한 명인 5,000원 지폐 속 인물인 ‘율곡 이이’ 또한,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신사임당은 19살에 혼인을 했는데 39살까지 친정에서 살았다고 하니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안 한다”는 처가살이를 한 셈이다. 조선 시대에 중국과 같은 혼인 의례인 <친영>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한 결과 현재처럼 신랑이 신부를 맞아 자기 집 식구로 데려 오는 <시집가다>가 일반화된 것이다. 

 대개 시집살이 노래는 구전 민요 형태로 전해진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시집살이를 견뎌야 하는 조선 시대 여자들 중 한 명이 이 여자는 사설 시조 가락에 시댁 식구 흉을 우회적으로 얹은 것이다.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고 불리는 사설 시조의 미학은 슬픔을 해학으로 승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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