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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킹라이프 '내 인생의 책'
​서정인 '강'

부킹라이프1    

1.    

서정인의 ‘강’을 읽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신문스크랩 파일을 정기적금 붓듯 즐기던

일본 유학생 남사친을 떠올리다.                

고등학교 1학년 왕십리에 있는 가톨릭청소년 회관 지하 b103호 서클룸에서 태문이를 처음 봤다. 영등포에 위치한 k고등학교 문예반 반장인 그 친구는 그로테스크한 시를 제법 잘 썼다.

키는 작은데, 어깨가 넓고 팔이 짧은 태문이는 전교에서 1,2등을 하는 수재였다.

‘개천에 용이 난다.’ 진부한 전설처럼 태문이는 공부를 잘했다.

자기 소개 시간에 독수리5 형제는 지구를 지키고, 자기 아버지는 구로동에 있는 초등학교를 지킨다는 되지 않는 개그를 하는 바람에 첫 만남에서 나는 가급적 녀석과 가까이하지 말아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녀석이 내 남자사람친구 1호다. 부리부리한 눈을 깜박이며 연신 헛웃음을 짓던 태문이가 회합이 끝나고 헤어질 때 악수를 청했다. 마지 못해 손을 내밀자 격하게 손을 쥐다 놓으며, 내 손바닥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소름, 그 당시 유행하던 다소 야한 제스처의 호감 표시를 뒤로 하고 다시는 그 습하고 구리구리한 서클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3년을 독서서클 멤버로 가까이 지내다, 녀석은 초등학교 소사인 아버지의 늦둥이 아들로 효도를 대차게 해냈다.

명문대 국문과에 진학한 녀석의 구멍가게 다락방은 ‘글밭’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돈방석 위에서 잠을 잔다고 너스레를 떨던 녀석의 말처럼 그 친구의 방은 점포 쪽방 철재 돈통 위 다락방이었다. 

태문이는 나의 호구(어수룩하게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루는 말)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사친과 연인의 경계에서 밀당을 하며 나는 설레지 않는 풋사랑을 즐겼던 거 같다. 나는 녀석의 가난이 싫었다. 그럼에도 촌스러운 애정 공세로 나의 여자로서 나의자존감을 지켜주는 녀석이 밉진 않았다. 

내가 태문이의 집을 가끔씩 놀러 가는 목적은 녀석의 다락방 벽면을 가득 채운 책을 빌리러 가는 재미가 솔찮이 좋았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과외를 하며 사 모은 책을 빌려 읽는 즐거움.

중학교 때부터 나는 활자중독자였던 거 같다. 그냥 책을 보면 배부르고 좋았다. 대학교 1학년 소설강독 시간에 박00교수님은 자신이 쓴 소설집을 읽고 레포트를 써오라 하시면서 책 뒷장에 붙은 교수님의 이름이 새겨진 인지을 떼어 붙여야 학점을 준다. 하셨다. 

책 살 돈 있으면 술을 마시던 때라 친구 책을 빌려 읽고 비평문을 쓰긴 썼는데. 책을 사야 떼어 붙일 수 있는 인지를 구할 수 없었다. 과 친구들과 낮술을 마시고 알딸딸한 상태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의 책의 인지를 몰래 떼어 오기로 했다. 삼세판을 연거푸 3번을 했으나 내가 졌다. 

서점 아저씨가 천장에 붙은 파리찍찍이를 바꿔 다느라 등을 돌린 순간 잽싸게 책갈피를 넘겨 인지를, 인지만 살짝 떼려는데, “학생!”하는 소리와 함께 매대 위에 놓인 먼지털이가 뒷통수를 가격했다. 유리문 밖에 숨어 있던 친구들이 끼득끼득 웃고 있는데, 그날 난 짧은 청치마를 입고  계산대 앞에 무릎을 끓고 인지를 떼려던 책을 머리에 이고 벌을 섰다.

책도독은 도독이 아니라는데, 영세 서점에 짜장면 2그릇이 더 되는 책도독을 웃으며 훈방 조치할 만큼, 서점 주인은 착한 분은 아니었다.

친구 중 1명이 진주홍빛 공중전화로 태문이에게 전화를 했고, 녀석은 낡은 청쟈켓 양쪽 주머니 가득 훔쳐온 백원짜리 동전과 십원짜리 동전을 양손 가득 내어 놓고 나를 구했다.

니 남자 친구냐고 묻는 친구들 앞에서 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왕이면 천원짜리 지폐를 훔쳐 왔으면, 녀석이 그날의 흑기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태문이는 대학 졸업 후 연구 조교로 교수님들 잔심부름을 하다,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있는 대학원에 합격을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난 녀석의 다락방에 소중히 보관된 수백권의 단행본을 내가 보관하고 싶단 욕망이 뜨겁게 올라왔다.

“저거 봐라 수진이 지난 참에 왔다 가면서 옆구리 가득 니 책 끼고 가더니 오늘 돌려 준다고 갸져 온 거 봐라, 아이라 내 보기엔 10권도 더 돼 보이더만 4권이 뭐꼬? 도독년이라 저거 책도독년.”

비 오는 날 빌린 책을 가져다 준다고 들린 다락방에 시큼한 김치전을 한 접시 붙여 올리며 태문이 엄마가 나를 째려 보셨다.

맞다. 책도독년 근데 증거가 없다. 내가 빌려서 안 돌려 준 책이 태문이 책이라는 녀석은 자기 책 표지 안쪽에 빨간 싸인펜으로 ‘내꺼’라고 써놓는 버릇이 있다. ‘태문이꺼, 아니고 내꺼’라고 썼으니 내가 가지면  내 책이다. 

암튼 일본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 책은 배편으로 미리 부쳤다고 하면서 평소에 내가 엄청 탐내던 a3 크기의 스크랩 파일 5박스를 리어커에 싣고 우리 집으로 가져 왔다. 문예 비평 기사, 신춘 문예 당선작들, 신간 소개 글, 북 리뷰, 문단 동정 꼼꼼하게 색인을 하고 비닐 파일에 년도별로 표시한 책보다 귀한 스크랩북을 나더러 맡고 있으라고 했다. 일본에 갔다가 비명횡사 하는 변수가 있을 시, 보관료로 스크랩북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자필 각서와 함께.

녀석이 일본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고전문학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온다는 4년 사이에 나는 결혼을 하고 신혼집 옥탑방에서 연립 4층으로 2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 스크랩 파일 박스 5개를 신주단지 모시듯 끌고 다녔다.

그리고 녀석이 일본에서 시간 강사를 하고 결혼을 하는 동안에도 그 파일들은 ‘내꺼’였는데,

‘천리안’이란 이동통신과 ‘야후’검색 엔진을 돌리는 컴퓨터를 갖게 되면서 그 파일들은 누우렇게 바랜 신문쪼가리가 되었다. 이제 검색만 하면, 파일 안에 갈무리된 정보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태평천하에 종이쪼가리 파일이라니.

그 후로도 오래도록 녀석의 보물 1호 쓰레기를 버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일본에서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며 나를 찾아온 녀석에게 “그때 맡긴 스크랩 파일 어쩔까? 아직 보관 중인데 라면박스에서 곰팡이도 피고. 벌레도 꼬물거리는 거 같고, 이 참에 니 가져 갈래?”하고 넌지시 물었다.

“헉 그 걸 아직도 갖고 있었다고? 대단하네. 야후 사이트에 넘치는 게 정보인데, 뭘할라고 그걸 갖고 있었너, 니 필요하면 가져.”하며 인심을 썼다.

“헐!”

집에 돌아 와서 스크랩북에 누렇게 쩌든 신문조가리를 하나 하나 꺼내 쫙쫙 찢으며(비닐과 프라스틱으로 된 대형 파일은 태워 버릴 수 없어서) 10년도 더 된 신문지 속에 싹을 틔운 책벌레(좀팽이라 불리는 먼지다듬이벌레)에 물려 오래 동안 고생을 했다.

서정인의 ‘강’이란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개천에 용이 났다.’고 기뻐하시던 친구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신촌에 있는 명문대에 재수까지 하며 합격한 날 초등학교 소사로 평생을 보낸 친구 아버지는 학교 선생보다 훨 존경스런 대학교수가 될 아들 자랑에 구로 4동 은행나무 골목 이웃들에게 새우젓을 얹은 돼지편육과 시루떡을 돌렸다. 

돈 없이 남의 나라에서 박사학위 따는 게 천지가 개벽해도 안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녀석은 일본 명문대학교 시간 강사와 한국어 강의를 하며, 30년째 재외동포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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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을 했다구? 좋은 일이다. 열심히 공부해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 영국, 불란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내 돈 한푼 안 들이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돈 없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흔한 것이 장학금이다. 머리와 노력만 있으면 된다. 부지런히 공부해라, 부지런히. 자신을 가지고」 

---------------------------------서정인의 ‘강’-------- 

이렇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로 소년의 전설을 지지하지만     

「너 공부 잘 하는구나」 하는 물음에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 라고 잘난 척을 숨지지 못하는 이모부네 가게에서 사환처럼 일하며, 공부로 출세한다고 믿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에게 마음 속 가득 사심을 담아서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을 주제에.’ 하고 말한다.

 작가는 늦깍이 대학생의 생각을 빌어 자신의 경험과 어우러진 조언을 한다. 소년이 듣지 못하는 독백으로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쳐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허옇게 색이 바랜 짧은 바지를 입고 읍내까지 몇십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 많은 동정과 약간의 찬탄. 이모집이나 고모집이 아니면 삼촌이나 사촌네 집을 전전하면서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낡고 무거운 구식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다가오는 학기의 등록금을 골똘히 생각하며 밤늦게 도서관으로부터 돌아오는 핏기없는 대학생. 그러다 보면 천재는 간 곳이 없고,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한 낙오자가 남는다.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떠한 것도 주임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가 성공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많은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 적중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적중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적중하건 안하건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데에 있다. 적중하건 안하건간에 그는 그가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창작과 비평 9호-1968 봄에 발표)    

이상하게도 이 소설의 제목이 ‘강’인데 이 단편 소설 어디에도 강이 나오지 않는다.  시작과 끝에 흰눈이 포근하게 내리지만제목인 ‘강’은 언제 나올까.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강은 나오지 않는다. 본문에 인용된다른 나라, 그러니까 영국의 템즈강이 스치듯 나온다.

 늙은 대학생이라고놀림받는 김씨의 술주정에서 대학생인 가난한 그는교수의추천유학을 노렸지만 좌절했다.그런 뒤 그는노력하면가능하다 믿었던 신분상승의 한계를 실감하고후회한다.그는 ‘개천에서 승천하는 용이 되고 싶은 시골 초등학교 반장인 5학년 아이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쳐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라고 마음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set the Thames on fire; burn the Thames. 템즈강에 불을 지르다는 거창한 일을 하여 이름을 떨치다는 뜻을 가진 숙어였다.‘템즈강의 화재’란 키워드로 검색을  해도 ‘강’이란 소설 맥락과 연관을 찾기 어려웠다. 누구나 출세 입신양명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의 관용어구인 거 같다.

일본에서 태문이는 한류열풍이 일본을 뜨겁게 달굴 때 도쿄 통신원으로 시 잘 쓰던 필력을 발휘했고, 현재를 일본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송과 관련 도서를 해, 템즈강에 불을 쳐지르지 않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 태문이는 아직도 책을 사 모으고 있을 테고, 나는 이제 내 돈 주고 알라딘에서 책을 산다. 자랑같지만 알라딘에서 워 30만원 이상 도서를 사는 고객에게 주는 프래티넘 고객이다. 명품백보다 책부자로 사는 게 정말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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