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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킹라이프 2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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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선생은 아예 수업을 포기한 듯 시험지 크기의 백지만 한 뭉치 달랑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이번 시간에 여러분과 처리할 것은 엄석대 문제인데 – 지난 시간에 선생님이 묻는 방법에 잘못이 있었다. 이제 다시 묻는다. 여러분과 엄석대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나? 단 이번에는 팔을 들고 일어나거나 큰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 이름도 적지 말고 여기 이 시험지에 여러분이 당한 일만 쓰면 된다. 선생님이 알기로는 여러분 중에 엄석 대에게 죄 없이 얻어맞은 사람도 많고 학용품이나 돈을 뺏긴 사람도 많다. 아무리 작더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모두 여기에 써라. 이것은 무슨 고자질이나 뒤돌아서서 흉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학급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하는 일인 만큼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고 의논하거나 간섭받아서도 안 된다. 모든 일은 이 선생님이 책임지고 여러분을 지켜주겠다. 그리고 스스로 백지를 아이들에게 한 장 한 장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그에게 품었던 야속함이나 원망이 눈 녹듯 스러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야, 하는 기분으로 내가 아는 엄석대의 잘못을 모두 썼다. 그런데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한참 쓰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서로서로를 흘금거릴 뿐 연필조차 잡고 있지 않았다.”    
ㅡㅡㅡ<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ㅡ중략    
ㅡㅡㅡㅡㅡㅡㅡㅡ    
“1987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이문열의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92년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시골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하여 반 친구들 사이에 군림하는 엄석대라는 인물을 통해 권력의 속성과 무기력한 대중들의 모습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한국사회와 역사, 권력의 속성,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이 작품은 엄석대의 몰락을 통해 권력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병태와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소시민적 근성을 비판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신촌에 위치한 소극장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연극으로 관람했다. 5번을 본 것 같다. 처음 한 번은 남자친구랑 봤고 3번째는 맞선 본 남자랑 봤고, 나머지 3번은 비 오는 날 기분 꾸물거릴 때, 혼자 가서 본 것 같다.

4번째는 비가 많이 와서 관객이 나 포함 4명인 적도 있었다. 선생님이 나눠 준 누우런 백지에 열심히 엄석대의 비리를 적는 한병태와 눈치를 보며, 백지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낙서를 하는 아이들의 뒷통수를 보며 울컥했다.     

나 역시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 나눠 준 백지 위에 

 “무엇이든 솔직하게 우리 반을 위해 선생님한테 건의할 내용을 쓰세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썼다가, 처절하게 짓밟힌 경험이 있었다.

담임이 나눠준 연습장은 다시는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디 않겠습니다 라는 각서였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특히 유리창 닦는 걸 검사 받는 장면에선 한병태에게 감정이입이 돼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유난스럽게 낮이 길었다. 선홍빛 노을이 내리기 전 역광이 유리창에 비치면 커다란 칠판에 자주빛 그림자가 유령처럼 떠 다니는 해질 무렵이었다.  교실에 훌쩍이며 앉아 나는 무언가를 쓰고 또 썼다. 담임샘의 검사에 통과를 해야 집에 갈 수 있다.     

창밖에서 같은 동네 단짝 친구 희순이가 까치발을 세워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힘내!” 교문 위로 선홍빛 노을이 고운 그늘을 드리우고 해가 뉘엿뉘엿 가라앉는 오후 6시, 나는 몽땅 연필에 침을 발라 가며 10칸 국어공책 가득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쓰고 쓰고 썼다.    

일주일 전 자습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너무 떠드는 이유를 쓰라 하셨다. 

 3교시 시작하는 종이 울리는데도 조개탄을 피운 난로 주변에서 장난을 치다가 불이 달아 오른 난로가 쓰러졌다. 마침 지나가던 교감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보건실에서 양호선생님과 수다를 떨다 교실을 비운 담임을 호되게 혼냈다.

그날 담임은 우리 반 아이들 모두를  책상 위에 올라 앉게 하고 의자를 머리 위에 들고 벌을 서라 했다. 

그걸로도 화는 가라앉지 않은   담임은 연습장을 찢어 한장씩 나눠 준 뒤  수업 분위기를 망치는 원인이 무언지 각자 솔직하게 쓰라고 하셨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소설에서 엄석대의 비리를 고발한 한병태의 고자질이 어리석인 행동이란 걸 알게  담임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순진하고 미련한 한병태처럼 나는 내 발등을 찍었다. 

  담임은 비밀 보장을 약속하며 우리반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쓰라고 하셨다. 국민학교 5학년 12살 철없는 우리들은   옆 짝이 볼세라 가림판을 세우고 연판장을 쓰듯 무언가 열심히 끄적였다. 

  반장이 거둬서  준 종이를 읽은 담임은  종례를 마치며

 “38번 이미경은 남아 선생님이 할 말이 있어.”라고 하며 신나게 책가방를 싸던 나의 하교길을 막았다.        








북킹라이프 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보자, 별로 애 쓸 것도 없이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 전의 책략 따위는 까맣게 잊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짜 눈물이었다. 얼핏들으면 느닷없고 이상하게 느쪄질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냉정히 따져 보면 그때의 그 눈물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저항을 포기한 영혼, 미움을 잃어버런 정신에게서 괴로움이 짜낼 수 있는 것 은 슬픔의 정조(情調)뿐이다.
나는 그때 아마도 스스로의 무력함이 슬퍼서 울었고, 그 외로움이 슬퍼서 울었을 것이다.
'「어이, 한병태.」
그 갑작스런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낌으로 변해 내가 창틀을 붙들고 울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씻고 그쪽을 보니 아이들을 저만치 떼어놓고 석대 혼자 창틀 아래로 와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에 없이 너그럽고 - 신비스러워 뵈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돌아가도 좋아. 유리창 청소 합격.」    
샘 솟는 내 눈물로 이내 뿌옇게 흐려진 그 얼굴 쪽에서 다시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짐작컨대     
그는 내 눈물의 본질을 꿰뚫어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서 이제는 결코 뒤집힐 리 없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나를 외롭고 고단한 싸움에서 풀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너그러움이 오직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이튿날 나는 그 감격을 아끼던 샤프 펜슬로 그에게 나타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략-----------------  


  

하교 후, 교실에 고독하게 앉아 잘못하지 않은 나의 행동을 반성하고 반성하려고 애쓰던 어느 날.

 추운 운동장에서 해거름이 질 때까지   나를 기다리던  희순이가 독감으로 결석을 했다.

그 날 종례 후, 나는  "제가 거짓말을 한 거 같다고 정말 잘 못했다."

반성문을 쓰고또 썼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이문열 소설 속의  한병태가 아무리 유리창을 뽀드득 뽀드둑 입김을 불어 가며 닦아도 문제는 유리창이 아이었듯이.

애초에 담임의 강요와 협박으로 점철된 살생부  쓰기의 숨은 의도는  '되바라진 계집아이의 싹수 꺽기"였다는 걸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난 영혼을 다해 연기를 해야 했다. 죄인 코스프레로 그녀를 만족시켜야 다른 침구들 틈에 섞여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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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정말로 공을 들여 내가 맡은 창문을 닦았다. 먼저 물 걸레로 유리창이며 창틀에 더께 앉은 먼지와 때를 씻어 내고 이어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신문지, 하얀 습자지(習字紙)의 순으로 입김을 호호 불어 가며 잔 먼지들을 없애 나갔다.
공을 들인 만틈 시간도 많이 걸려 내가 두 개의 창틀 유리를 말끔히 했을 때는 반 아이들 태반이 자기 몫의 청소를 끝낸 뒤였다.  그가 눈으로 내가 닦은 창틀을 훑어보는 동안 나는 가슴 두근거리며 결과를 기다렸다. 
ㅡㅡㅡㅡㅡ중략ㅡㅡㅡㅡㅡㅡ    
.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안되겠는데. 여기 얼룩이 그대로 있어 다시 닦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략-------    

담임을 대신해 청소 검사를 하던 석대의 복수로 유리창를 닦고 또 닦으며, 굴종을 배우던 한병태처럼 난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걸 선택했다. 그래서 연극으로 본 한병태의 유리창 닦는 장면을 보면서 고통스러웠던 거 같다

 손톱 끝이 아리도록 꼭꼭 눌러 쓰던 “미경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 문장이 형광펜을 칠한 듯 강렬하게 떠올랐다.

 . "그래! 이제야 니가 진실을 말하는 구나.”라고 그녀는 말하고  10칸 노트 10장 가득 반성문를 쓰면 용서해준다 말했다.     

난 고마워서 너무나 감사해서 울고 또 울면서 반성문을 썼다. 내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면서 난 손톱끝이 빨개지도록 쓰고 또 썼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30장을 다 채우자, 담임이 어두워지는 교실에 홀로 남겨진 나에게 와서 내가 쓴  반성문을 한장씩 찢어 바닥에 던졌다. 그리공 싸늘하게 웃으면서 글씨가 개발새발이라고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다시 쓰라 했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침을 발라 한 자씩 눌러 쓰다 보면 질 나쁜 공책에 구멍이 났다.     

“됐다. 이제 집에 가도 돼.”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나를 꼭 아주 꼬옥 안아 주며 내 귀에 이렇게 말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 미경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샘이 이렇게 한 게 너 미워서 그런 거 아니란 거 알게 될 거야. ”    

12살 어린 아이인 내가 겪은 11월말 끔찍한 교화의 시간은 악몽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당시 담임선생님은 학부형들에겐 신과 같은 존대로 인식되던 때라 전학을 갈 생각이 아니면, 견뎌야 하는 부당함이었다. 그리고 날 기다리며, 훌쩍이는 나의 눈물을 닦아 주던 희순이와 헤어질까 봐 전학갈 생각도 못했으니    

2년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5학년 담임 근황을 듣게 되었다. 스승의 날 선생님 댁에 같이 가자는 친구의 전화에 그냥 희죽이며 웃었다. 

난 이 기억이 나의 상상의 지어낸 픽션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기억 속으로 쳐박아 두고 암시롱  않은 척 잊고 살아 가는 중이다.

한병태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 줄까 고민 중이다. 엄석대가 어른들에 의해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가는 걸 안타까워하는 어른이 된 한병태에게 니 잘못이 아니라고 석대를 세상밖으로 내몬 건 어른들이고 무책임한 교육이라고 말해주면서 포근히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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