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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18. 2023

식물과 기계와 나

* 이 글은 arte365 에 실린 글입니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식물등이 생겼다. 우리 집은 오후 한 시 반 정도만 되어도 햇빛이 이미 잘 안 들기  때문에, 언제나 식물들에게 햇빛이 부족했다. 겨울에는 특히 창가 자리에 찬 바람이 들어와서 온도가 내려간다. 그래서 온도를 높이려고 집 안쪽으로 들여놓으면 햇빛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시간대에 따라 일일이 화분들을 모두 옮겨주는 것도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몸이 그에 따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작년에는 식물들에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흙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먹고 햇빛을 맞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식물등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순수한 자연이라는 것은 이미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20세기 후반에 자연과 사회의 관계가 재설정되면서 “자연이 사회의 외부로, 또는 사회가 자연의 외부로” 이해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연은 이제 문명이 정복할 대상이 아닌, 문명을 지탱하는 동시에 문명에 의해 위태로워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대상으로서 “문명세계의 내부 장식”이 되었기 때문이다(『위험사회』, 새물결, 2006). 그런 상황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플라스틱에 담긴 영양제를 주면서 ‘자연스러운’ 것을 찾는 나 자신이 한편으로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물등을 들이고 마냥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건 내가 식물에게 덜 신경 쓰려는, 나의 편리성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햇빛이 부족한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고, 바깥에 내놓는다면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식물들이 죽을 것이다. 바깥에 있는 화단에 심어두었던 무화과는 지난겨울을 무사히 났지만, 얼마 전에 관리실에서 부른 용역업체에 의해 잘려 나갔다. 나는 집 안에서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빨리 찾아야 했다. 도시에서 동거하는 식물과 나 사이에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가전제품으로 유명한 한국의 대기업에서 나온 ‘식물생활가전’ 광고를 봤다. 와인 냉장고와 흡사한 모습의 이 기계는 해당 기업에서 파는 ‘씨앗키트’와 영양제, 그리고 물을 정확히 매뉴얼대로 사용하면 식물을 “알아서 보살펴” 준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빛, 온도, 통풍, 습도를 완전히 통제하여 “자연의 낮과 밤”을 구현함으로써 식물 성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준다는 이 기계에 나는 자꾸만 거부감을 느꼈다. 도대체 흙도 벌레도 없는, 내가 먹다 남은 씨앗을 심을 수도 없고, 실패할 수도 없는 자동화된 자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심지어 씨앗키트는 대부분 식용 채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어느 정도 크면 뜯어 먹는 식물과 사람 사이에는 시간도 관계도 쌓일 수 없다. 


깔끔한 흰색 플라스틱과 유리로 만들어져 벌레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 가전제품은 자연과 문명 혹은 사회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를 보여주기보다, 자연을 완벽히 문명 안에서 통제하고자 하는 모습을, 그래서 사람과 자연 사이에 어떤 ‘이야기’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식물에 대한 가장 도시적인, 편리하고 매끄러운(seamless) 도구화라고 해야 할까. 각 식물의 특징에 따라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어서 애플리케이션으로 성장 환경을 조절하고, 관리 직원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기계도 정비해 주는 이 시스템에서 사실상 기계를 산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물 주기뿐이다. 


식물을 기르면서 제일 어렵고 흥미로운 것은 집에서 그대로 따를 수 있는 매뉴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집마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파낸 탄광에서 유해가스를 감지하는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식물들은 계절뿐 아니라 냉난방 등 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른 위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시종’(sentinel species)이다. 2021 아르코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에서 본 시셀 마리 톤(Sissel Marie Tonn) 작가의 <감시종 되기>(Becoming a Sentinel Species)라는 작품은 바다에서 건진 미세플라스틱을 자기 몸에 주입하는 연구자들을 보여준다. 환경의 변화를 온몸으로 함께하면서 사실 자신이 언제나 감시종이었음을 깨닫는 이들처럼, 식물을 매일 섬세하게 살피는 식물의 반려인간 ‘식집사’도 식물의 환경 안에서 그것을 깊이 느끼며 감시종이 되어간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기술의 본질을 ‘자동성’과 같은 매끈하고(seamless) 독립적이고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비결정성’으로 이해하며, 바로 이 점이 인간이 기술적 대상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는 조건이라고 말한다(『시몽동의 기술철학』, 김재희, 아카넷, 2017). 어딘가 어긋난 불일치나 불완전함에 나와 아버지는 날마다 햇빛 등에 따라 식물등을 대략 1시에서 2시 사이에 켜고, 4시에서 5시쯤에는 끈다. 날씨를 보고 창문을 열거나 화분 걸이에 식물을 내놓기도 한다. 이런 어설픈 조절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뜻밖의 성과에서만 우리는 함께 숨 쉬고 함께 목마른 인간과 식물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과 식물이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은 ‘어긋난 이음새(seam)’를 기꺼이 견디고 “덜컹거림을 감수하며 그 틈새로부터 예상치 못한 곳으로 기꺼이 뻗어가는 역량”(『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김원영, 사계절, 2021)을 기르는 일이 된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우리 동네의 당근마켓에는 한 무료 나눔 게시물이 올라왔다. “식물 특효약, 빗물 무료 나눔”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직접 모은 빗물이 담긴 재사용 페트병으로 가득한 어느 집의 거실 사진이 등록되어 있었다. 네모난 가전제품에 완벽히 통제되는 식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모바일 네트워크 플랫폼으로 빗물을 나누는 행위에서 우리는 기계를 통해 식물과 ‘연결’된다. 이런 얼기설기한 관계 안에서 식물과 기계와 나는 서로의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 변화시키며,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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