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부 1학년 때 2015-2학기 글쓰기 수업에서 기말 과제로 쓴 글.
우리가 일차적으로 인식하는 것들은 존재를 품고 있는 존재자들이다. 존재자는 육화된 존재로서 감각될 수 있는 대신 무한히 생동하는 ‘존재’는 물질에 갇혀 버렸다. 따라서 존재를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는 존재자를 사유로써 파고들어 이차적으로 그 안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핵심은 존재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특히 인식하는 주체의 측면이다. 인식에서는 나의 바깥의 것들이 추상화되어 나에게 들어온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고, 나에 의해 변화된다.
이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존재의 위장’을 갖고 있다고 상정하자. 인간은 자신의 시선, 관심, 기분 등의 주관적 요소에 따라 자신이 감각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존재자들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인식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인식된 존재자는 추상화되어 우리의 사유 체계 속으로 편입되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가 담기는 곳, 즉 존재의 위장이다. 존재자는 존재가 육화된 것이기에, 추상화된 존재자는 곧 존재이다. 우리가 섭취한 존재는 존재의 위장으로 들어가는데, 이 위장의 작동 원리는 실제 위장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존재의 일부를 소화해서 나의 일부로 만들고, 나머지는 배설된다. 많이 먹으면 위장이 늘어나기도 하듯, 존재의 위장의 형태 또한 변하기도 한다.
인식 이후에 나타나는 인간의 반응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일종의 면역 반응이다. 위장에 들어간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질적이다. 이때 이질적인 것의 종류와 존재의 크기에 따라 인간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독성을 품은 존재가 들어오거나, 존재가 너무나 많이, 혹은 크게 밀려들어오면 우리는 구역질을 느낀다. 그리고 수용할 수 없는 수준으로 존재가 위장을 채운다면 결국 섭취된 존재는 범람해서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존재의 구토다. 위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가 가득 차 버릴 때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은 가슴의 답답함, 두통, 현기증 등이 있다. 우리는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손이 잡히는 것을 집어 던지거나, 심지어는 자해까지 하면서 터져 나오는 존재를 토해 낸다. 존재는 구토자 주변의 분위기가 되어 주변에 묻는다. 구토자의 주변은 얼룩이 진다. 거부당한 존재의 얼룩이 묻으면, 특히 타인에게 묻은 존재의 얼룩은 타인이 그 냄새를 맡게 하고, 그의 존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존재의 구토는 감정 반응에서 두드러진다. 에드먼드 버크는『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고통이 즐거움보다 더 강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면, 감정 중에서도 고통은 구토를 일으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인 것이다. 다양한 심리학 실험과 경제학에서는 인간이 이익보다는 손실에 더 크게 반응한다는 주장이 통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 명제들을 종합하고 확장하면, 인간은 결국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더 크게 반응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부정적인 감정, 즉 고통과 슬픔은 인간이 존재를 토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고통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특히 그 중에서 인간을 오래 괴롭히는 것은 슬픔이 심화, 발전된 고통이다. 슬픔은 즐거움을 주던 대상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인간은 슬픔에 빠져 있으려는 경향마저 가지고 있는데, 이는 슬퍼하면서 결국 즐거움을 주던 대상을 떠올리며 잃어버린 즐거움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다시 닿을 수 없는 즐거움을 떠올리는 것은 결국 한층 깊은 슬픔을 낳을 뿐이며, 나아가 좌절의 고통을 발생시킨다. 이 고통이 유독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슬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고통을 꺼리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부단한 노력을 하지만, 슬픔을 전제로 한 고통은 인간이 그 속에 침전하게 한다. 이 고통의 존재는 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위장에 쌓이게 두면 결국 존재의 위장은 염증으로 문드러져 제 기능을 못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기민하게 면역 반응을 일으켜야 하고, 이는 우리의 감정적 생존을 위한 본능적 반응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리는 외부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타인의 고통이,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이자 당사자의 고통이 끝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바로 이 감정적 면역 반응에 있는 것이다.
4월의 어느 날, 나는 광화문에 있었다. 같은 검은 옷을 입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버스들 사이를 채우고 있었고, 오합지졸의 거대한 분노는 버스와 검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버스가 없었다면, 이 검은 옷들이 없었다면, 분노한 민중에 의해 불탔던 궁궐의 정문 앞에 앉아 바다가 삼킨 자식들을 부르짖던 부모들과 함께 목 놓아 울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부모들이 앉아 있던 곳 근처의 버스가 흔들렸고, 곧이어 그리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졌다. 당신들도 물에 잠겨 버리라는 듯이, 걸음걸음이 찰랑찰랑할 만큼 물이 쏟아졌다.
물은 더 이상 우리에게 생명의 상징도, 화합의 상징도 아니었다. 물은 죽음이자 죽임이었다. 아이들을 삼킨 물은 부모마저 삼키려 했고,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던지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부터 우리에게까지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우리의 존재의 위장은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작았다. 그것의 독을 중화시키기에는 너무나 약했다. 그들의 고통을, 나의 속을 꽉 채우고도 더 밀려들어오는 그들의 지독한 고통을 분노로써 토했다. 검은 옷들을 향해 절규했다. 니들이 그러고도 사람새끼들이냐고, 미쳤냐고, 저 사람들이 도대체 무얼 잘못했느냐고. 우리의 처절한 구토는 서로를 더욱 적셨고, 분노와 고통의 악취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존재의 토사물로 얼룩진 공간에서, 구토로 비워진 존재의 위장은 더욱 공허했다. 알지 못하는 수백 명의 어린 타인들의 존재가 그 공허한 위장을 떠돌기 시작했다. 슬픔과 고통은 이렇게 구토로 전이됐다. 익사한 존재자들 속의 존재들은 강제로 해방되어 추상화된 ‘물’, ‘아이’, 그리고 ‘생명’을 들락날락하며 그것들에 투영되고, 이 일반적 개념들 속에서 영원히 생동하며 존재자들의 사유를 얼룩지게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죽음은 그들의 존재를 토하게 한다. 존재자로서의 구토, 존재자이기를 멈추는 마지막 총체적 분출로서의 구토, 그것들은 나의 ‘생각’을 얼룩지게 한다. 추상화된 슬픔과 고통, 추상화된 ‘그들’이 우리의 생각으로 밀려든다. 여전히 내가 암 환자를 보면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떠오르듯, 그 모든 분출된 존재들은 세상의 모든 관계된 존재에 침투한다. 처음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기억 속 작은 할아버지의 하회탈 같은 웃음이었지만, 지금까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암’, ‘죽음’, ‘할아버지’와 같은 단어들이다. 특수한 타인의 고통, 죽음이었지만, 후에는 그것이 추상화되고 일반화되어 관련된 개념들 속에 침투한다.
그렇게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으로 얼룩진 사유 체계가 또 다른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과 마주치는 순간에는 새로운 얼룩이 더해진다. 이처럼 우리의 사유 체계, 우리의 존재의 위장은 끊임없이 얼룩져 간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과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재에 질문하게 하면서 우리를 성찰로 이끌고, 인식하는 방식마저 바꾸어 놓음으로써 우리의 존재 양식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가만히 있다가 바다 속에 영원히 잠겨 버린 수백 명의 아이들, 그리고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나의 작은 할아버지, 이들의 특별한 죽음은 이제 나에게 보편적인 고통이 되었다. 나는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이 보편적인 얼룩을 간직한 채 살아가야만 한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 생명, 그리고 죽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나의 얼룩진 눈동자를 간직한 채.